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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Jul 29. 2022

남편 말고 '내 편' 만드는 법

 “결혼 안 했어요. 한 번도.” 시대가 많이 바뀌어 ‘한 번도’라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야 할 때가 있다. 비혼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오히려 ‘부럽다’로 수렴되어 어리둥절하곤 한다. 부럽다는 말은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아이슬란드에 다녀왔다는 말에 ‘부러워요’하고 자동반사적으로 하는 말처럼. 아이슬란드에 기회가 닿아 가면 좋겠지만 꼭 가겠다는 결심하는 일은 드물다.      


결혼 안 한 이유를 묻고, 걱정한 후 ‘이상하게’ 보는 시선만 거두어도 변했다고 느끼는 것은 과거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지구의 자전이 매일 쌓여 해가 바뀌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위기는 서서히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이따금 어색한 상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얼마 전 결혼정보회사에 입사한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결혼정보회사에 가입을 권유했다. 영업이라는 순수한(?) 목적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뼛속까지 내면화해서 남편이 없는 나를 ‘구출해줄’ 기회라서 신이 난 것 같았다. 나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싱글을 구출할 사명감으로 무장한 것 같았다.      

나는 물론 단칼에 거절했다. ‘결혼 시장’에서는 가정을 이루겠다는 하나의 뚜렷한 목표가 있고, 이 목표를 향해 함께 노력하려는 이들이 만난다. 가정을 이룰만한 조건을 갖추었는지 서로가 가진 패를 보여주고 무대에 나선 선수인 동시에 심사위원이 된다. 이처럼 결혼을 대전제로 마음을 탐색하는 만남은 나에게는 안 맞는다. 나는 마음과 마음이 만난 후에야 결혼제도가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이다.      



지인 입장에서는 배려를 나는 간섭이라고 느꼈다. 결혼을 인생 숙제로 보고, 배우자 없이 혼자 사는 삶을 미완성이라고 전제했다. 결혼 안 한 사람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애라는 진부한 말을 답습했다. 이십 년 넘은 결혼생활 동안 배우자와 정서적으로 교감하지 못해 상처받고 외로웠던 마음을 이따금 토로하면서도 말이다.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상 가족관’의 뿌리는 지인이 가정을 지키는 힘이다. 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이다.        



   


나는 어쩌면 결혼을 너무 신성하게 보는지도 모른다. 남녀가 자연스럽게 만나서 꽁냥꽁냥하고 다투고, 다툼을 헤쳐 나가며 정이 쌓이고, 헤어지기 싫어서 결혼하는 서사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은 살아있는 유기체라서 변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불같이 타올랐던 사랑의 감정도 시간이 흐르면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 다른 종류의 감정이 찾아든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비슷한 희로애락을 겪는 동지애 같은 잔잔한 사랑이야말로 ‘내 편’으로 남는 결말이 아닐까.         


이런 추상적 생각은 결혼과 거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한 소설가가 결혼 이유를 곱씹으며 적은 글이 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안전하게 느끼고, 둘이 되면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안전한 아파트에서 살수 있어서 결혼한 건 아닐까, 하고. 실용적이고 명쾌한 이유가 없으면 결혼은,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하기에 어쩌면 거추장스럽지 않을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로 현재 왕이 된 찰스는 일반인 다이애나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세기의 사랑과 결혼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왕비가 된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우리는 매일 원하든 원치않든 지켜보았다. 하지만 세기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해 마침표를 찍었고, 다이애나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영화 <스펜서>는 다이애나가 크리스마스 휴가 2박 3일 동안 왕실 가족과 보내면서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고립을 그렸다. 세상 누구보다 든든한 가족을 비롯해 아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세기의 여인이었지만 그녀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화 상대였다. 납득할 수 없는 전통과 예절만을 고집하는 왕실 가문에서 그녀는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수행해야 할 규칙과 전통만 브리핑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삶을 통째로 삼킬 정도로 강력한 고립 속에서 그녀는 처절하게 혼자 싸웠고 결국 자해로까지 이어졌다.  그녀의 편이 있었다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정서적 지지를 주고받을 때 ‘내 편’이 있다고 믿고, 안정감을 느낀다. 호르몬이 엮어내는 이성과의 케미는 유통기한이 있다. 세기의 커플도 피해갈 수 없었고,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같은 편 내지는 내 편이라는 동지애이다. 이 동지애가 없으면 갈등 상황을 돌파할 엔진 없이 사는 셈이다. 동지애는 이성 배우자여야만 할까?     


오히려 사고와 감성의 결이 같은 동성이 오히려 내 편으로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황선우 작가와 김하나 작가가 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서 이성애 기반의 전통적 가족 개념을 뒤집는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새로운 가족 모델을 제시한다. 두 여자와 고양이 네 마리가 가족이 되는 ‘조립식 가족’을 이루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다른 취향을 가진 두 여자가 만나 고양이 집사로 함께 살아가며 겪는 에피소드 중 황선우 작가가 새 직장으로 첫 출근 날 이야기가 있다. 김하나 작가가 첫 출근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아침에 데려다주는 장면이 있다. 이보다 든든하고, 섬세하기까지 한 내 편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 모두에게는 절대적 지지를 보내주는 ‘내 편’이 필요하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었고, 성인이 되어 경제적, 정서적 독립 후에는 부모님 이외에 내 편이 필요하다. 남편은 ‘남의 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결혼제도에 들어가야 내 편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무슨 일을 하든 존중하며 신뢰를 보여주며 시간을 쏟으면 내 편이 생긴다. 내 편을 만드는 건강한 법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관계의 질은 쏟은 시간과 정성에 비례한다. 내 편으로 배우자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구겨서 휴지통에 넣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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