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급 공무원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사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많은 청년이 젊음을 바쳐 얻고 싶어 하는 자리, 공무원, 그것도 7급을.
“남편이 있으니까 그만둘 수 있었겠죠.”내가 말했다.
“아니, 남편이 있으면 왜 먹고살 걱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반문을 받는 순간, 흠칫했다. 남편 수입이 든든해서 그가 철밥통을 박차고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나에게 화들짝 놀랐다. 남편은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 대상이라는 뿌리 깊은 내 무의식이 부끄러웠다. 내 추측과 달리 남편 역시 프리랜서였다. 부부는 고정 수입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뇌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 언니가 새삼 멋져 보였다. 멋지면 다 언니라고 했으니까.
나는 고정 수입에 대해 고정관념이 있었다. 둘이 살아도 마찬가지지만 혼자 살려면 경제적 독립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남성이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경제권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도 경제적으로 독립은 필수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사실을 일찌감치 안 언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고정된 수입은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음식과 집, 옷을 얻을 수 있는 안정된 수입은 증오심을 끝내는 힘이 있다고 썼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도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 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게나마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도 유산상속을 받아 큰돈은 아니지만, 고정 수입이 생기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금수저 언니라고 단순히 생각하지 말자. 울프 언니가 살았던 시대에는 여자가 할 수 있는 경제 활동이라고는 가정교사, 가사 정도 외에는 거의 없었다. 여성 화가나 작가도 남성 이름으로 활동하던 척박한 시대였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여성도 교육받을 기회가 늘어났고, 사회 참여나 경제 활동 영역도 늘어났다. 굳이 여성이라고 숨길 이유도 없어졌다. 하지만 울프 언니 시대와 다른 어려움이 있다. 취업하기도 어렵고, 취업을 하더라도 기대 수명이 늘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늙을 때까지 같은 직장에 다니기 힘들다. 비혼으로 살려면 내 밥벌이는 내가 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 생각에 빠지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출구가 없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워워-. 자신을 다독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월급을 받는 근로자는 월급 받는 동안에는 안정적인 경제 상황을 이어갈 수 있다. 수입을 알 수 있으니 지출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물결이 펼쳐지는 시대에 직장 근로자는 안정적 직업이 아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은행원은 안정적 직업군에 속했다. 하지만 은행에서 벌이는 일이 세계에서 머리 좋은 수학자들이 교묘하게 숫자를 이용해 투자 상품을 만들어 수익을 내는 꼼수를 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전만큼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 상품이 없다. 또 비대면이 가속되어 예금이나 적금 등 은행 업무를 인터넷에서 다 처리할 수 있다. 은행은 투자 상품으로 수익을 내기 어렵고, 우리는 은행에 갈 일이 줄었고, 고객이 줄어드니 은행 지점도 급격히 줄었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있다. 본캐와 부캐라는 말 속에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직업 불안정성이 들어있다.
직업도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에 가장 좋은 재테크는 부동산, 주식, 비트코인 등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은 옳지 않다. 돈을 가장 확실하게 모으는 방법은 통계상 적금이라고 주식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이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주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인데 극소수의 일반적 이야기로 회자되는 착시 현상이 널리 퍼져있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투자는 ‘나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생각에 따라 추상적일 수도 있고, 구체적일 수도 있다. 당장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좋아하는 일에만 매진하는 방법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 불나방 같은 방법이야말로 추상적이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경제적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면 초조하게 될 것이고, 다시 직장으로 복귀해서 쳇바퀴를 돌려야 할 것이다. 결국 좌절감만 느끼고 원점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
오히려 현재 다니는 직장에 그대로 다니면서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오고, 기회가 왔을 때 잡으려면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믿는다. 해변의 모래처럼 흔한 말이지만, 이 말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차이가 크다. 나는 대박을 믿지 않는다. 인생은 한 방이 아니라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이다. 초조하거나 성급하면 일을 망치게 된다. 특별한 것 없는 말에는 결국 모든 비밀과 비법이 들어있다.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잘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게 맞다.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혼동하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가늘고 길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승률이 높다.
내 경우에는 여행을 좋아했고, 여행을 도피처로 삼았다. 꾸준히 여행을 다녔고, 나만의 여행법이 생겼다. 단기간 여행이 아니라 거의 30년 가까이 일 년에 한두 번씩 다녀왔다. 다른 데 돈을 쓰지 않고 여행에 돈을 썼다. 또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서 많이 읽었다. 책 욕심도 많아서 한 인터넷 서점에서 ‘골드’ 레벨을 꽤 오랫동안 유지했고, 서점에서 붙여주는 골드 레벨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책에는 길이 없지만, 책을 읽으면 생각이 늙지 않는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일을 밥벌이 수단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이나 독서는 돈을 쓰는 일이지 돈을 버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에는 돈을 써도 도파민이 나온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는 구별하기 쉽다. 돈을 쓰는 게 아깝다면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사랑의 원리와 같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시간과 돈을 써도 아깝지 않은 이유가 바로 내가 즐겁기 때문이다.
오로지 숨구멍을 만들기 위해 시간과 돈을 쓰면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19로 백수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새로운 일을 모색했다. 오십이 넘어서도 나는 왜 진로 고민을 멈출 수 없는지, 고민스러웠지만 이 역시 내가 헤쳐 나갈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을 때 여행하는 법과 글쓰기였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일이고, 해왔던 일이다. 여행 글쓰기 강의계획서를 작성해서 무턱대고 지원했고, 기회를 얻었다. 그 후 여행 에세이 책을 냈고, 글쓰기 강의를 여행 영역만이 아니라 일상 에세이로 확장 중이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보다는 일의 범위를 넓히는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충실하고, 책임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러면 먹고 살 정도는 벌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억세게 운이 없거나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1만 시간의 법칙이 통한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3시간씩 10년, 하루에 10시간씩 3년이면 전문가가 된다. 처음부터 전문가는 없다. 1만 시간을 버티는 사람이 어느 날 전문가로 불린다.
영화 <자산어보>를 만든 이준익 감독은 1만 시간의 법칙을 보여주는 ‘존버’의 아이콘이다. 영화 <왕의 남자>가 천만 관객 흥행을 달성했을 때 여기저기에서 인터뷰를 읽었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를 꾸준히 만들었지만 <왕의 남자> 이전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럴 때 그는 버티는 게 답이라고 했다. 30만 원으로 한 달을 버티는 법도 안다고 했다. 영화판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언젠가 흥행 영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영화는 개봉되어 뚜껑을 열 때까지 아무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주사위 던지기와 비슷하다. 촬영에 대해서는 촬영 감독이 제일 잘 알고, 조명은 조명 감독이 제일 잘 아니까, 각 분야 감독들의 결정에 따른다. 감독이라고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예산을 초과하지 않고 예산에 맞춰 영화를 찍기 때문에 영화를 계속 찍을 수 있다."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의 인터뷰였다. 그는 영화에 자신의 이상을 투영할 욕심이 없어 보였고, 영화감독을 하나의 직업으로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말은 회사에서 특징 없는 만년 과장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처럼 들렸다. 대박 흥행 감독도 아니고, 예술적 완성도에 욕심부리지도 않지만, 여전히 그는 영화를 찍고 개봉한다. 그는 영화 한두 편 만들고 사라지는 감독이 아니라 계속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남아있다.
오래전에 읽었던 인터뷰를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의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힘을 빼고 거창하지 않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좋아하는 일에 돈 쓰기, 이것이 나에게 투자하는 방법이다. 혼자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투자이고, 가장 좋은 재테크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