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중심의 집단 문화에서는 옷이나 취미 장비조차 소속 기호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옷을 비롯한 장비를 마치 집단으로 들어가는 패스로 여긴다. 똑같은 장비를 사용하지 않을 때 집단 바깥에 머무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옷이나 장비를 기능적 면에서 보아야 할 하지만, 실제로 잘 안 보일 때가 종종 있다. 소비 심리는 소속감으로 자아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욕구라고 알려져 있다.
집단 맥락에서만 정체성을 찾게 되면, 스스로를 ‘미운 오리 새끼’로 만들기 쉽다. 물론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라 우리가 속한 '맥락'을 벗어나서 생각하기 힘들다.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는 맥락의 위력을 보여준다. 어린 오리는 알에서 나왔을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큰 오리를 보고 '엄마'라고 결정했다. 그 뒤 다른 오리들과 형제들이 어린 오리의 추하다고 말하자 스스로를 추하다고 여겼다.
어린 오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제시하는 시선을 의심하지 않고 내면화해서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어린 오리는 인식에 대전환점을 맞이한다. 추운 습지에서 사냥개 한 마리가 다가왔으나 오리를 지나쳤고, 어린 오리는 자신의 못생긴 외모 덕분에 살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일을 겪고 오리는 자신의 외모에 감사하게 된다. 어린 오리가 정체성을 다르게 인식한 것은 무리 바깥에서였다.
어린 오리의 불행은 집단 내에서 자신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비롯되었다. 어린 오리가 오리 무리를 벗어나 백조 무리에서는 '보편적' 정체성을 회복한다. 동화의 결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더라도 우리가 그 메시지를 내 삶에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현재 속한 집단에 갇혀 집단의 유행을 좇으며 정체성을 소속감에서 찾으려는 문화에 살고 있는 탓이다. 나도 트레킹을 하면서 뜻밖의 일을 겪곤 한다.
트레킹을 시작할 때 등산복이 옷장 서랍 하나를 차지하게 되고, 이런저런 장비를 사들이게 될 줄 전혀 몰랐다. 걷기 운동이니 트레킹화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둘레길이나 산에 가려면 나에게 잘 맞는 발목이 올라온 중등산화를 찾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등산화는 모양이 아니라 기능이라는 걸 몰랐다. 미끄러지지 않으며 발을 보호하려면 말이다. 첫 번째 등산화는 기능보다 모양을 보고 샀다. 얄상해서 등산화답지 않아 투박한 등산화 사이에서 튀었다. 등산화 같지 않은 모습에 반했지만, 트레킹 친구들은 내 신발을 내려다보며 한 마디씩 조언했다. 발을 보호하려면 밑창이 두툼해야 한다며. 두 번째 등산화는 가볍고 발목까지 오는 평범한 등산화로써 모두의 조건을 만족시켰지만 정작 내 발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등산화는 한두 치수 크게 신어야 하는 걸 모른 대가로 엄지발톱이 사계절 내내 멍든 후에야 세 번째 등산화를 만났고 마침내 안착했다.
높은 산에는 잘 안 가는 편이지만, 다정한 트레킹 친구들의 권유에 휩쓸려 따라나설 때가 있다. 고도가 높은 산에서 날씨 예보만 믿고 조롱당한 적이 있다. 예보에는 맑음이었지만, 비바람이 몰아쳐서 조난당할 뻔한 적이 있다. 산에서 저체온증에 걸리면 나만 위험한 게 아니라 함께 간 친구들도 위험에 빠진다. 자기 몫의 묵직한 배낭을 메고 있어서 내 몸은 내가 챙기는 것이 등산 예절이다. 변덕스러운 산 날씨에 대비해서 기능성 재킷 하나도 장만해야 했다. 바람과 비를 두루두루 막는 역할을 하려면 고어텍스 재킷만 한 것이 없었다.
고어텍스 재킷은 높은 산에서는 유용하지만 낮은 산이나 둘레길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고어텍스가 아닌 가벼운 방풍 재킷도 필요했다. 장갑, 티셔츠, 바지, 모자 등도 계절별로 준비해야 했다. 트레킹을 시작한 첫해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등산복을 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모자도 겨울 모자와 여름 모자 소재가 달랐다. 추위와 더위, 바람, 햇볕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는 소소한 장비가 하나둘씩 늘었다.
걷기 운동을 하려면 튼튼한 두 다리와 가성비 좋은 폐활량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준비물이 많았다. 발가락 사이에 마찰을 줄여서 물집이 잡히지 않도록 도와주는 양말, 땀을 흡수하는 기능성 옷,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여줄 등산스틱과 무릎보호대 등등. 단순한 걷기 운동에 슬금슬금 장비발을 세울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옷장에 등산복이 늘어났고, 등산용품이 서랍 하나에 가득했다.
등산복은 기능성 소재를 사용해서 신상은 비싸다. 기능성 제품은 제조 연도와 브랜드에 따라 가격 차이도 크다. 다행인 건 이월 상품이 있다는 것이다. 아웃렛 몰에 가면 처음 팔렸던 가격의 절반이나 3분의 2 정도만 주면 살 수 있다. 고가일수록 할인 폭이 크다. 한두 해 전에 만들어진 상품은 기능적 측면에서 전혀 문제없다. 다만 신상이 아닐 뿐이다.
등산복은 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아웃도어 용품 세계에도 수입 명품이 있다는 사실에 점점 눈을 떴다. 한국의 많은 산악인과 트레커가 떠받치고 있는 수입 명품 양대 산맥이 있다. 다양한 색감을 자랑하며 한국인이 선호하는 디자인으로 인기를 끄는 캐나다 브랜드와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 친환경을 지향하는 스웨덴 브랜드이다. 두 회사에서 만든 셔츠 한 벌 가격은 수십만 원이고, 1백만 원이 넘는 재킷도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고가인지도 몰랐다. 이 고가의 등산복을 입고 둘레길에 나타나는 사람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명품’ 등산복이나 모자나 배낭, 크로스백과 같은 소품 하나쯤 안 가진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등산복과 배낭 등 등산용품에 은근한 위계가 생겼다. 수입 명품 아웃도어 용품을 어디 가면 할인가로 살 수 있는지가 대화 내용이 되곤 했다. 수입 명품 브랜드 등산복을 입고 걷고 싶은 욕망이 희미한 나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할 말이 없다. 날씨가 변덕스러운 히말라야나 에베레스트 같은 높은 산에 가는 것도 아니고, 서울 경기 둘레길을 걷거나 고작해야 등산로 정비가 잘 된 국립공원에 간다. 바람 잘 막아주고, 더울 때 땀 흡수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속으로 주장하곤 한다. 굳이 입 밖으로 말해 집단 정서에 반기를 들 용기는 없다.
어느 날 아웃렛 몰에 갔다가 처음 보는 브랜드의 등산복이 헐값에 팔리는 것을 보았다. 멀쩡하고 독특하면서 예쁘기까지 한 간절기 방풍 재킷이 2만 원이었다. 안 살 수 없었다. ‘사는 것이 무조건 남는 것’이라는 정신을 실천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국내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야심 차게(?) 준비했던 청년 감성의 아웃도어 브랜드였다. 청년 감성을 겨냥한 탓인지, 브랜드 인지도 탓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망했다고 한다. 원래 가격은 20만 원이 조금 못 되었지만 회사가 ‘망한’ 덕분에 2만 원에 살 수 있었다. 재킷 자체는 흠 하나 없었다. 2만 원으로 잡은 행운을 널리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생각지도 못한 득템에 기분이 좋아서 재킷을 입고 안양에 있는 수리산 둘레길에 갔다. 잔잔한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동네 숲길이다. 그날 모인 트레킹 친구 중 명품을 하나도 갖지 않은 사람은 A와 나뿐이었다. A는 나와 함께 걸으며 모두가 가진 명품을 하나도 갖지 않아서 혼자 튀어 소외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혼자 튀니 얼마나 좋냐며 가슴을 펴고 그에게 2만 원짜리 재킷을 자랑했다. 물론 A의 귀에 2만 원짜리 재킷 이야기가 들릴 리 없었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집단 프레임에 갇히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탓하고, 이미 가진 것을 홀대하기 쉽다. 백조는 백조고 오리는 오리다. 백조가 아무리 오리처럼 보이려 해도 결국 백조이다. 옷이 아무리 고가여도 옷일 뿐이고 장비는 장비일 뿐이다. 다수가 선호하는 고가의 브랜드 옷을 입는다고 해서 걷는데 필요한 다리 힘과 근육이 생기지 않는다. 몸을 직접 움직여 많이 걸어야 근육이 생기고, 숲길을 감상하는 감성과 지식은 땀 흘린 경험에서 생긴다. 산에서는 장비발을 세울 때가 아니라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쓸 때 자신감이 생긴다. 자신감은 돈으로 살 수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감은 시간을 들여 만든 나만의 것, 나만의 시선이 생길 때 생긴다. 자신감이 있으면 집단 맥락에서 벗어나도 당당할 수 있다.
이 삶의 원칙은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비혼으로 살려면 필수 장비이다. 집단 바깥에서 ‘나만의 것’을 찾아내는 마음 훈련을 해야 한다. 고유한 '내 무늬'를 가질 때 다수의 물결과는 다른 방향에 서 있어도 불안하지 않다. 자신감이야말로 쉽게 살 수 없는 진짜 명품 장비이다. 가진 것을 보여주려고 안달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오라(aura)를 느낄 때 비로소 자신감은 힘을 얻는다. 호수에서 우아하게 유영하는 백조가 자신이 백조라고 말할 필요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