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은 돈, 건강, 적당한 일, 그리고 하나 덧붙이면 호기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질적으로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도 있지만 기질적으로 호기심이 별로 없는 사람도 있다. 호기심은 행동으로 이끄는 추진력이 되어 삶에 다양한 무늬를 만든다.
봉천동에 있는 한 북카페에서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이 쓴 5권으로 번역된 《특성 없는 남자》 읽기 모임을 하고 있다. 《특성 없는 남자》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세계 3대 의식의 흐름 소설이라고 쓰고, 읽기 고역인(!)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첫 모임에서 소설의 난해함에 대해 당황스러운 감정을 나누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뒤 페이지로 넘어가면 앞 페이지에서 읽은 것을 완전히 잊는 공통된 경험을 이야기했다.
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소설이 필요해서 읽는 것도 아니다. 온전히 독서의 즐거움을 찾아서 읽는 터라 안 읽어도 그만이지만 나름대로 소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소설에서 언급된 니체의 사상이 궁금해서 유튜브에서 철학 강의를 찾아보는 사람, 번역자가 쓴 논문을 찾아서 읽어본 사람, 시대상을 반영하는 용어를 검색하며 학구적으로 읽는 사람도 있다. 즐거워야 할 취미 독서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독서가 되었다. 답답증으로 독서 행위 자체에 대한 회의감으로 바뀌는데도 사람들은 참고 읽는다. 일도 바쁜데도 자기 전까지 난해한 책과 씨름하는 성실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앎을 향한 호기심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호기심이 많으면 느끼는 것이 많아서 다채로운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러면 지루할 틈이 없고, 혼자 살아내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내면의 힘이 생긴다.
나를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드는 기준은 나이에 따라 변한다. 어릴 때는 대체로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뒤처지기보다 앞줄에 설 때 내가 꽤 근사한 사람처럼 보인다.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서 경쟁을 뚫고 취업하는 등 목표를 설정하고 이루어냈을 때 ‘내가 마침내 해냈어’하고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
중년에는 많은 시간과 열정을 바쳤던 일은 평생 동반자가 될 수 없는 것을 깨닫는다. 자아실현을 잊은 적 없이 살아왔지만, 대체 자아실현이 무엇인지 점점 알쏭달쏭하고, 삶이란 녀석에 무게가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그동안 살아온 큰 틀은 견고해서 문득 담장 높은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보여 스스로가 안쓰럽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일을 해내는 자동인형으로 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창살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에 모든 것을 걸면 번아웃이 찾아온다. 일은 나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세상을 보는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로만 나를 증명하려고 생각하면 위험하다. 일을 잃으면 내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를 일과 ‘기타 등등’으로 증명할 수 있을 때 건강한 나로 살 수 있다. 자신이 자동인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은 철저하게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AI가 아니다. 일의 무게가 삶의 의미가 되면 언젠가 대형 사고가 난다.
대형 사고를 막기 위해 틀을 깨는 돌파구를 찾는 것이 중년 비혼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퇴사는 대안이 아니다. 어릴 때는 퇴사하고 다른 짓을 하다 다시 입사할 수 있다. 시간이 이를 허락한다. 하지만 중년에 준비 없는 퇴사는 더는 용기가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출근하는 것이 재밌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일에서 자아 성취를 하는 것은 겪어봐서 잘 안다. 대체로 그럴 수 없다. 사실 자아 성취란 말에는 일이 단순히 밥벌이 말고 고상한 가치까지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허상을 투영한다. 자아 성취란 말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자아를 성취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며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신적 가치를 두는 ‘기타 등등’의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경험을 많이 해서 세상을 보는 창을 다채롭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한 경험과 상상력 안에 갇혀 있다. 시간과 돈은 유한해서 직접 모든 경험을 할 수는 없다. 이럴 때 유용한 것이 간접 경험이다. 간접 경험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다른 세계에서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책에는 길이 없다. 작가가 되는 법, 부자가 되는 법, 주식 투자로 성공하는 법 등의 책을 읽어도 작가가 되지 않고, 부자가 되지 않고, 주식으로 성공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책을 왜 읽나? 책을 읽으면 생각이 늙지 않는다. 생각은 루틴 크기에 맞게 멈추기 마련인데 책을 읽는 사람은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접해서 생각이 늙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긴다. 원래부터 내면이 강한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주변 분위기를 무시하고 꼿꼿하게 혼자 서 있을 수 없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다.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 구성원이므로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내면의 힘이 생기면 덜 흔들려서 타인의 시선에서 조금 자유로워진다. 이 힘은 내가 나를 돌보며 다독이는 데 중요하다.
또 책을 쓴 저자나 책 속 인물들이 살아가는 태도에서 배울 점이 있다. 우리의 행동반경은 정해져 있어서 실제로 나와 비슷한 사람만 만나며 산다. 그러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고 착각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만나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배경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유튜브를 비롯한 SNS로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접할 수 있지만, SNS야말로 닫힌 채널일 경우가 많다. 내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 중심으로만 모이는 온라인 관계는 오히려 시야를 좁게 할 수 있다. 책에서는 다르다. 책은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인물을 만날 때가 많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실제 세상을 보는 창의 폭이 넓어진다.
책에는 살아가는 방법이 들어있지는 않지만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내 삶에 적용할 기회를 준다. 진짜 좋은 점은 인물이 마음에 안 들면 책을 덮으면 그만이다. 관계를 끊는 방법도 아주 간단하고, 인물들이 섭섭하다고 따지지도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고 들인 비용에 비해 얻는 것이 많은 경험을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호기심만 있으면 된다.
언젠가 남미 여행을 꿈꾸면서 체 게바라처럼 인생을 바꾸는 여행은 못 하더라도 현지인들의 감성을 직접 느끼고 싶은 꿈을 버킷 리스트에 넣어두었다. 그전에 스페인어 배우기도 버킷 리스트에 함께 있다. 마침 집 근처에서 스페인어 강좌를 발견하고 달려갔다. 강좌가 열린 곳은 놀랍게도 탱고 스튜디오였다. 같은 동네에 20년이 넘게 살았지만 탱고 스튜디오가 있는 줄도 몰랐다. 스페인어를 배우는 사람 10명 중 7명이 탱고를 배우는 사람이었다. 탱고와 스페인어의 이 관계 무엇? 얼떨떨했다.
두 번째 수업이 끝난 후 상관관계를 알게 되었다. 탱고 음악은 남미 음악이고, 음악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면 춤추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가사를 음미하면 감정이 풍부해져서 탱고를 더 느끼며 출 수 있다는 말이 와락 와 닿았다. 언어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언어를 알게 되면 문화를 이해하는 폭이나 깊이가 달라진다. 언어를 모르는 것은 때로는 아이 같은 순진함을 가져오지만, 언어를 알면 안 보이던 세상이 보인다.
중장년에 탱고를 배우고,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려면 결심이 필요하다. 퇴근 후 탱고를 배우고 스페인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춤에 대한 생각도 달랐다. 탱고는 남녀가 커플을 이루어 밀접한 신체 접촉이 발생한다. 낯선 이성과 신체 접촉이라는 정신적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지금은 춤을 '그저' 춤으로 바라보지만 과거에 춤은 모두 '춤바람'과 연결짓는 시선이 있었다. 곧 '노는 아줌마/아저씨'라는 함의를 담아 색안경을 끼고 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춤은 그저 스포츠와 레저,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활동일 뿐이다.
나는 심한 몸치라 탱고를 배우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운데 거기다 탱고 언어까지 배우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적극성이 탐났다. 뭐든 적당히 하는 내 기질과 달리 덕질을 하려면 끝장을 볼 때까지 하는 사람을 보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호기심은 다채로운 일상으로 뛰어드는 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