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취업한 후에 마음이 흔들리는 시기를 한 번쯤 맞이하기 마련이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두려는 마음이 고개를 들며 '발광체'가 된다. 사람마다 그 시기가 다르겠지만, 나는 서른 즈음에 강렬한 발광체가 되었다. 서른은 이십 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20세가에서 21세기로 넘어가기 전에 전 세계 언론은 오두방정을 떨었다. 마치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처럼 말이다. 나이 앞자리 숫자가 3으로 바뀌는 것에 나도 세기의 대전환 때처럼 호들갑을 피웠다.
공부했던 시간이 아깝기 시작했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서 안달복달했다. 일이 하찮게 느껴져 어떤 날은 땅으로 꺼질 것만 같았다. 10년쯤 후에는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나를 꿈꿨다. 어떤 일을 하겠다는 구체적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막연히 ‘다른’ 일을 하는 '다른 나’를 상상했다. 매일 가슴에 혼돈의 바람이 훅 불었다.
하지만 방법을 잘 몰랐다. 직장을 다니다 무작정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예술 이론이라는 이름을 지닌 근사한 학문 뒤에는 경직된 위계질서가 촘촘하게 엮여있었다. 학문은 학자로 살아갈 준비가 된 사람에게나 다정했지 나처럼 학문을 도구로 보는 사람에게는 혹독했다.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손흥민이 좋아서 축구화를 신고,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과 비슷했다. 관객으로 축구광이 되는 것과 필드에서 선수로 뛰는 것 사이에는 깊고 어두운 틈이 있었다. 상상도 못 했던 다른 종류의 땀을 흘려야 했다.
시작 동기는 단순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영화에 빠졌던 터라 영화 언저리에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동아줄이라고 여기며 영화제도 기웃거렸고, 시나리오 작법에도 한 발 담갔다. 시나리오를 비롯한 모든 창작에는 스토리텔링이 핵심이었고, 발상을 전환할 수 있는 반짝거림이 내게는 불행히도 없었다. 인생은 발버둥 쳐도 내 것것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경험과 시간은 알려주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노력은 해피엔딩이라는 등식을 종종 보았다. 땀은 언젠가 보상받는다는, 가슴 뭉클한 감동 드라마가 보여주는 서사가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곤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노력은 감동 드라마가 아니라 허튼짓으로 끝날 때가 더 많다. 그러면 현생에서는 포기해야 할까, 슬그머니 뒷걸음질 칠 준비를 한다.
영화 이론은 영화 보기와 다르다는 것을 뼛속까지 체감한 후에 다시 생업으로 돌아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은 달랐다. 잘하는 일은 노력 대비 보상이 후하다. 노력한 것보다 성과가 더 나올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모든 밥벌이의 공통점은 단조롭고, 종종 지루하다는 것이다. 창의성에 기반을 둔 크리에이터일지라도 말이다.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필요하다. 바로 마음이 끌리는 일에서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 시나리오를 쓰고 싶었고, 소설을 읽으면 소설을 쓰고 싶었던 꿈만 많았다. 지금은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하지만 당연히 쓸 수 없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 일에 진심을 바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나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영혼까지 쏟아붓곤 한다. 어느새 좋아하는 일은 우선순위에서 점점 밀려 좋아했던 기억만 남게 된다. 정신 차리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열정으로 충만했던 나를 그리워하게 된다.
긴 호흡으로 보면 열정이 꼭 좋지만은 않다. 열정은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은 곧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장작에 처음 불을 붙이면 활활 탄 후에 재에 불씨가 남아 주변을 오랫동안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바로이 꺼질 것 같아 힘이 없어 보이는 불씨가 뒷심을 발휘할 때가 많다.
좋아해도 안 되는 일에는 온 몸을 던지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다. 온 몸을 던지지 않되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고, 수입의 일부를 쓰면서 잊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내 몫의 책임을 다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가늘고 길게 하는 것이다. 욕심내지 않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그저 취미로 곁에 둔다. 칸트의 가르침대로 즐거움을 위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진심을 담아 딴짓을 할 때 돈과 시간을 쓰면서도 아깝지 않다. 좋아하는 가수가 콘서트를 하면 십 수만 원을 지출하고도 원하는 티켓을 구해서 주변에 자랑한다. 여행하는데 한 달 수입을 다 써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 돌아오면 남은 건 쓸데도 없는 기념품 몇 개가 전부이지만 말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거창한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그저 즐겁고 기분 좋기 때문이다. 밥벌이 이외에 시간을 쏟는 일의 뿌리를 캐면, '기분이 좋아서'이다. 지속할 수 있는 동기를 떠올리면 단순하다. 그저 기분이 좋으니까.
현재 무용한 것 같은 일을 지속하는 것은 위기(?)를 대비하는 방법일 수 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고 했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코로나 탓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영어 강의에서 손을 털었다. 하지만 글쓰기 강의를 하게 되었다. 다른 문이 곁에 계속 있었지만, 하나의 문이 닫히지 않으면 다른 문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다른 문을 열어젖힐 수 있었던 힘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가늘고 길게 했던 글쓰기에 있었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쓰는 데 있다. 김영하 작가는 발표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서랍에 넣어두는 것을 꿈꾼다고 했다.
글로 밥벌이할 수 있는 재능이 없는 것을 일찌감치 받아들이고, 취미로 곁에 두기로 작정했다. 순수하게 내 만족을 위해 썼다. 마감도 없어서 내킬 때만 썼고, 사람들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책을 읽거나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쓰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업으로 삼으려고 쓸 때는 빈 페이지에서 깜빡이는 커서만 보면 머릿속이 텅 비었지만, 취미로 삼으니 달랐다. 할 말이 넘쳐서 커서는 빠르게 움직이며 비어있던 페이지는 금세 빼곡하게 찼다. 대가를 바라지 않았기에 내킬 때만 했고, 그 덕분에 꾸준히 할 수 있었다.
백 세 시대를 사는 슬기로운 자세는 도파민과 엔도르핀 수치를 올리는 ‘딴짓’ 하나 쯤 만드는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딴짓이 있을 때 갈팡질팡한 마음도 빨리 제자리로 돌아온다. 일에서 모든 것을 구하지 말고, 필요한 만큼만 하고 거리를 두는 게 좋다. 일은 내가 아니다. 일은 일일 뿐이니 나를 나답게 만드는 즐거운 딴짓을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