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게시판에 가끔 마주하는 질문이 있다.
“4.50대에도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나요?”
나도 이십 대에는 중년 아줌마, 아저씨도 아련하고 복잡한 감정이 있는지 궁금했다. 스물네 살에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였다. 조교는 서른한 살이었다. 학자가 될 게 아니면 냄비 받침으로나 쓰일 석사 논문에, 선배는 잔뜩 공을 들이며 시간을 보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여전히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 선배가 자신만의 궤도를 도는 먼 행성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나에게 서른은 행성의 거리를 잴 때나 사용되는 광년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제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쏜살같이 흐르는 걸 겪어야 알다니. 지금 나는, 그때 선배 나이보다 스무 살 이상이나 많다. 서른이면 뭐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어서 나이 듦을 실감한다. 그러니 청년들이 4,50대가 사랑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낄지 알 리 없다. 나이 들면 감정도 늙을까? 음, 감정은 늙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이런저런 학습을 통해 감정을 자제할 뿐이다.
나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지 않는 편이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첫눈에 반하려면 조건이 있다고 했다. 그가 쓴 《연애론》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반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지만, 성별에 상관없이 공통될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상대에게 어떤 의심이나 경계심이 없어야 한다. 경계심을 갖지 않으려면 경계심을 갖는 데 지쳐 있어야 하고, 자신에게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는 상태여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갖는 순간 홀딱 반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사랑의 열정은 상대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열정이다.’라고 말한다. 스탕달만이 아니라 많은 철학자가 사랑의 감정을 비슷하게 설명했다.
중년의 사랑은 스탕달이 말한 조건에 일치한다. 결국 사랑은 나에게서 생기는 감정이으로 상대의 매력과 비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애착 인형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애착 인형은 사실 특별한 인형이 아니라 어디서나 살 수 있는 인형이다. 생일 선물이든 혹은 아니면 즉흥적 선택이든 아이는 특성 없는 인형을 손에 얻은 날, 의미를 부여한다. 인형에 감정을 실어 영혼을 불어넣는다. 그러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인형’이 탄생한다. 인형은 아이 곁에서 침묵하며 그저 있을 뿐이지만, 아이는 정서적 안정감을 느낀다.
사랑도 이와 비슷하다. 살다 보면 단단히 떠받치고 있던 마음 근육이 사소한 이유로 무너지곤 한다. 햇살이 좋아도 눈물이 나고, 꽃잎이 바람에 날려도 눈물이 나고, 비가 와도 눈물이 난다. 음악을 들어도 눈물과 콧물을 쏟는다. 책을 읽다가도 눈앞이 흐려져 책상에는 어느새 눈물과 콧물 닦은 휴지가 수북하다. 이럴 때 약해진 마음 근육을 치댈 수 있는 애착 인형이 절실하다. 사랑할 준비가 된 상태이다.
사랑은 건조한 일상을 촉촉하게 만드는 순기능이 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들뜨고, 잘 쓰지 않아서 굳어버린 웃음 근육도 풀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부작용도 따라온다. 일상을 덤덤하게 이어가는데 필요한, 오랜 시간 다져온 마음 근육을 한순간에 흐물거리게 할 수 있다. 나는 감정에 휘둘려 휘청거리는 것을 경계한다. 연애는 감정 에너지를 많이 잡아먹는 일 중 으뜸이라 잔뜩 몸을 사린다. 사랑은 지나가도 일상은 남아서 지속되니까.
마음을 얻고 싶어서, 서로 마음의 크기가 달라서 애면글면하는 시간을 통과할 때도 있다. 마음을 얻는 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필요 이상의 에너지가 들 때가 종종 있다.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욕심이 너무 크면 영혼에 좀이 슨다. 그럼에도 문학과 예술에서는 사랑을 예찬한다. 사람의 마음을, 때로는 인생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사랑은 문학과 예술이 제일 좋아하는 주제이다. 상대의 마음을 내 뜻대로 주무를 수가 없고, 재단할 수도 없다. 예술가들은 사랑에 몸을 던지는 선수들이다. 그들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처가 창작의 원동력일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예술가의 자질을 나누어 가질 수는 없다.
가슴 속에서 불이 활활 타면 장작을 덜어낸다. 희미한 친밀감을 지향하면서 사랑이란 팻말이 붙은 오솔길로 소심하게 한 걸음 내디딘다. 계속 걸을 만한 길인지 탐색한다. 내면에서 솟아나는 실용적 필요성도 한몫한다. 과거 연애를 뒤돌아보면 언제나 내 감정에 미숙했다. 내 감정을 잘 몰랐고, 당연히 성숙하지 못한 태도로 상대를 대했다. 이제 얼굴도 기억 잘 안나는 구남친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있다.
감정적 미숙함을 만회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미성숙에서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도전이라면 도전, 실험이라면 실험을 해 보고 싶다. 굳이 정의하자면 ‘감정 영역에서 자기 계발’쯤 될 것 같다. 사랑으로 이끄는 또 하나의 중요한 동기는 노화에 대한 두려움이다. 매일 몸과 마음이 쇠락의 문턱을 성큼 넘은 것을 지켜본다. 심장의 뜨거운 피가 식기 전에, 마음의 불꽃이 꺼지기 전에,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보물찾기라고, 옅은 희망을 품는다. 안다. 이 희망은 헛된 바람이라는 것을.
청년의 연애가 상대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공통분모를 서로의 기억에 새기는 것이라면, 중년에는 상대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만나는 것다. 마음에는 각자 품은 추억과 기억을 가지고 만난다. 사는 방식이 차곡차곡 쌓여 습관이라는 녀석도 등에 업고 만난다.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하는 일에 따라 생긴 고유한 무늬의 옷도 챙겨입고 나타난다. 경험이란 벽돌로 쌓은 벽이 높을수록 두 사람이 함께 쌓을 수 있는 영역이 적어진다. 한 사람을 얻는 일은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 곁에 두는 것이라고 했다. 함께 보낼 미래만이 아니라 과거, 그리고 과거 경험이 그 사람에게 낸 흔적까지 품을 수 있어야 사랑이라는 길 입구에 설 수 있다. 이 입구는 둘이 통과하기에 아주 좁다.
살아온 시간 탓에 눈치도 빠르고, 상처받을 거 같으면 약삭빠르게 뒤로 물러선다. 서로 맞지 않는 결을 맞추느라 쓸데없이 힘을 빼지 않는다. 불꽃 같은 열정은 있지만, 오래 타오르기 힘들다. 사랑의 감정은 아마 아흔이 넘어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그 온도가 다를 것 같다. 나이에 맞는 마음의 온도가 있지 않을까. 중년에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가 좋다. 국이 뜨거우면 입을 데인다. 후후불어 적당한 온도로 식힌 국이 목으로 넘기기에 알맞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