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알 May 02. 2022

느슨한 관계를 꿈꾸다  



몇 년 전 독립잡지 <언니네 마당>을 만들 때 한 여성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탈코르셋’ 행사가 열렸다. 존재 가치가 없는 무용한 것으로 설움 받는 겨드랑이털을 자랑하는 대회도 열렸고, 우리 여성을 옥죄는 브래지어를 벗어서 걸어두는 상징적 의식도 있었다. 행사 드레스코드도 있었다. 붉은색으로 달거리를 상징했다. 옷장에 안 입고 10년도 넘게 걸어만 두었던 빨간 바지를 꺼내 입고 행사장에 갔다.   

   

탈코르셋 행사에 진심으로 섞이지 못한 채 잡지 부스를 지키며 기발한 아이디어로 뭉친 행사에 적극적인 언니들을 지켜보았다. 잡지는 뷰티와 육아라는 여성 잡지의 공식을 버리고, ‘평범한 언니들의 특별한 내면 이야기’를 다루었다. 유명인도 안 나오고, 생활 정보도 없는 잡지라 인기 있을 리 없고, 직접 알려야 했다. 이런저런 행사에서 참여해서 잡지를 알렸던 터라 잡지 부스에 오는 한 줌의 사람도 고마웠다. <언니네 마당>을 전혀 모르는 한 여성이 다가왔다. 지나가다 들렀고 행사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잡지 취지를 말했다.      


3050이 주요 독자층이라 결혼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편집부 식구 네 사람 중에서 나 혼자 비혼이었다. 처음 본 사이였지만 가부장적 결혼제도에 속하지 않는 삶에 대해 맥락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비혼주의자로 살고 싶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혼인 서약으로 가족에 얽매이는 결혼은 자신에게 안 맞는 옷 같다는, 빠른 결론을 내렸다. 그 바람에 내가 비혼인 것을 밝혔다.      


그녀는 내가 비혼인 것에 반색했고, ‘비혼’ 키워드로 초단시간에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나처럼 나이 많은(?!) 비혼을 주변에서 아직 본 적이 없다고 했다. 4,50대 비혼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지만, 알 턱이 없어서 답답했다고. 나이 들어서도 혼자 잘 사는 사람을 만나서 반갑고, 내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뜻밖의 요청이었다. 비혼으로 살 결심이 흔들릴 때 내 사진을 보면서 위안을 얻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그녀가 들어 올린 휴대전화 카메라를 응시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휴대전화 속에 내 사진을 저장한 채 총총 사라졌다.      


내 눈에는 그녀는 고작(!) 서른을 넘겼을 뿐이라 비혼 세계 문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서른이면 여러 가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게 펼쳐진, 연애하기 딱 좋은 나이이니까.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슬픔에 빠져도 여유로운 나이다. 하지만 서른 살에는 정작 느긋해도 되는 나이란 걸 모르는 저주에 걸린다. 나도 삼십 대가 지나고 나서 알았으니까.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그녀를 가끔 생각하곤 한다. 그녀는 지금 바람대로 살고 있을까? 정말로 비혼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을까? 아니면 그사이에 헤어지기 싫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을까? 아직 내 사진이 휴대전화에 남아 위안을 주고 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시대 사람이 하늘 아래 있는 것을 알기만 해도 기분이 나아진다. 혼자가 아니라고 희미하게 느끼는 것만으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중년, 비혼, 여성은 사회적 소수자이다. 비운 밥그릇 숫자 만큼 경험도 쌓였다. 사적 여정에서도, 공적 사회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경험의 흔적이 개성으로 드러난다. 개성은 라이프스타일도 지배한다.   


살아 온 시간과 경험이 엮여 한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을 만든다. 이 정체성은 비혼 중년 여성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 정체성 탓에 타협하길 꺼릴 때도 있다. 사적으로 관계를 맺는데 신중해지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 혼자서도 잘 사는 법을 탐구한 터라  가치관을 희생해야 한다면 뒷걸음질 치며 살며시 등을 돌리기도 한다.     

 

어려움도 결국 혼자 겪고 극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 헤쳐가는 것이므로. 외부에, 특히 나와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와 맞지 않으면 침묵에 점점 익숙해진다. 적극적인 사람들은 연대의 필요성을 소리 높여 말하지만, 중년까지 비혼으로 살았다면 바깥쪽에 조용히 서 있기를 택하는 데 익숙할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상황이나 곤란한 상황에 빠질 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것도 주저한다.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혼자 헤매며 찾는 데 익숙하다. 무엇을 할 때 기분이 나아지는지 경험을 통해서 체득했다. 취미생활에 몰두한다든지, 문화생활을 하거나 여행을 가거나, 자기 계발에 몰두한다. 가정생활에 일정한 시간을 바쳐야 하는 의무에서 자유로워 상대적으로 시간이 두둑하다. 두둑하게 챙긴 시간을 자신을 위해 보낼 수 있다.      


아무리 소극적이더라도 주변에 친구나 교류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외롭게 혼자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관계를 맺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다. 사람들과 적절하게 거리를 두는 편이고, 사람에게 기대를 많이 하지 않는다. 지나친 기대는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걸 아는 탓이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잔잔하게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선호한다. 홍재희 작가는《비혼 1세대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고립된 혼자가 아니라 따로 또 같이 사는 삶, 혼자 살면서도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다. 연인, 친구, 동료끼리 한집에서 살 수도 있고, 각자의 집에서 살되 서로 가까이 살아 일상과 돌봄을 나누는 관계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아플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와주며 책임져 줄 수 있는 법적인 생활동반자 관계를 맺되, 그 외의 것은 철저히 각자의 사생활로 남겨 두는 느슨한 관계로 살고 싶다.’(241)     


내가 꿈꾸는 것은 바로 홍재희 작가가 말한 ‘느슨한 관계’이다.      


이전 05화 축의금 대신 책값 받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