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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Feb 25. 2022

연애나 마음껏 해

“연애나 마음껏 해.”     


지인들이 인심 쓰듯이 나에게 하는 말이다. 홀몸이니 자유연애를 즐기라는 부러움을 담은 응원의 말이다. 관계에 온전히 몰입하지 않고, 상대에 대한 기대치를 내려놓으면 연애하기 어렵지 않다. 연애를 잘하고 자주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호감만 있어도 연애에 뛰어든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남녀 관계에서 그다지 쿨한 사람이 아니다. 가볍게 연애해야지 마음먹어도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상대도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호감으로 가볍게 시작하려고 마음먹어도 감정이 자라면 생각에 사로잡힌다. 지나친 생각은 관계 유지에 해로우면 해로웠지 유익하지 않다.      


이성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지려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원론적이지만 추상적이고 까다로운 요소들이다. 이 모든 요소를 다 갖춘 완벽한 사람은 없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관계가 돈독해진다. 다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이지만, 원래 평범한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겉으로 보기에 당연한 것들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건강한 연애에는 이 요소들을 위해 '땀' 흘릴 자세가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기꺼이 땀을 흘리려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고 나도 조금만 힘들면 등을 돌리고 달아날 궁리부터 한다.     


남녀 관계에서 책임을 털어버린 채 가볍게 꽁냥꽁냥만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연애나 해’란 말에 삐딱해졌다. ‘그냥 연애나’라니. 연애가 무엇인지 여러분은 잊으셨나요?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짙은 먹구름이 곧 핑크빛 감정을 뒤덮곤 했던 일이 기억 안 나시나요?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 롤러코스터에 탑승해서 높이 솟구쳤다가 곤두박질쳤던 시간을 정녕 다 잊으셨단 말인가요?     


마트에 가서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을 때조차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 둘러댄다. 필요하니까, 당장 필요하진 않아도 원 플러스 원 할인 행사를 하니까. 견물생심이 구매 목록에는 없었지만, 있으면 편하니까 등등. 중년에는 연애를 시작하고 발전 시키는데에도 '필요'를 충족시켜 한다. 뻣속까지 차오르는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다든지, 주말에 혼자 있는 게 죽기보다 힘들다든지, 둘이 살면 생활비가 절약된다든지. 정서적 이유든 실용적 이유든 내가 필요해야 마음도 움직인다. 앞뒤 재지 않고 ‘사람 자체가 너무 좋아서’ 같은 숭고한(?) 가치로 사람을 좋아하기에 중년은 세상을 너무 많이 알고, 무엇보다 지쳐있다. 


 

2,30대에는 상대를 만날 풀pool이 비교적 넓고,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아서 비슷한 경험치를 가지고 연애 출발선에 선다. 이성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며 설레고, 두 사람이 다르기에 겪는 갈등도 처음이라 비슷하게 헤맨다. 중년에는 다르다. 상대를 만날 풀도 좁고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연애 주기를 한 바퀴 이상씩 돈 사람도 많다. 결혼과 이혼도 경험한 사람도 만날 수 있다.    


나이 드는 것은 경험으로 짠 두툼한 갑옷을 입은 편견 덩어리가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경험은 양날의 검이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는 간지럽고, 참신함이라고는 없는 말이 실천하기 어려운 철학적 명제가 된다. 사랑을 잃으면 상처도 받고 상처의 흔적도 남는다. 다만 희미해질 뿐이다. 신은 우리에게 ‘망각’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살 의욕이 없어 늘어져 있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진다. 그리고 추억이 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세상 모든 일에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겪어서 안다.     


심장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도 세월이란 고개를 넘으면 멀쩡하게 잘 산다. 그러면서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도 터득한다. 상처의 흔적이 희미한 무늬가 되어 불쑥불쑥 도드라진다. 더불어 상대를 볼 때도 자신만의 기준이 생겨 까탈스럽게 된다. 과거 관계에서 좋지 않았던 상대의 단점을 마음속에 새겨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쓱싹쓱싹 재단한다.      


중년까지 비혼으로 살았다는 말은 오랫동안 혼자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이란 뜻이다. 일이든, 취미든, 인간관계 등 일상을 버텨내는 나만의 방법이 있고, 나 잘난 맛에 중독된 사람이다. 상대에 따라 출렁거리며 춤을 추는 일을 경계한다. 게다가 사느라 바쁘고, 자신에게 에너지를 집중하는 사람이다. ‘나의 성취’에 몰입해서 매일 셀프 토닥임과 셀프 응원까지 하느라 여유가 없다. 시간과 신경이 분산되면 자체적으로 위험 사이렌을 울리며 옐로카드를 발행한다. 옐로카드를 받으면 마음이 위축되어 상대를 탐색할 물리적 시간과 의지를 접는다.      


살아온 날이 차곡차곡 불어나면 연애하더라도 나를 온전히 던지는데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어릴 때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서, 커트 코베인을 좋아해서, 영화 취향이 같아서 등 하나만 보고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세월은 이 순수함을 거두어간다. 상대만을 바라보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열정 따위는 없다. 이미 자신만의 가치관과 습관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서 내구성이 강한 직물처럼 만든 루틴이 있다. 이는 두꺼운 방패처럼 바깥에서 날아오는 화살도 막을 정도이다. 상대에게서 탐탁하지 않은 점을 발견하면 관계의 끈을 놓을 궁리부터 한다.  

    

인간관계, 특히 남녀 관계에는 품이 많이 든다. 본래 가지고 있는 나쁜(?) 습관을 잘 포장하는 것도 필요하고, 내가 바라는 바를 상대가 수용 안 해 줄 때 회복탄력성도 필요하다. 열정보다는 사람 자체를 지지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럴듯한 당위성이 없으면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제자리로 빨리 돌아간다. 관계를 지속하려면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만나서 감정이 흔들려서 힘들기를 꺼린다. 차라리 혼자 치맥 먹으면서 넷플릭스나 보는 게 더 편할 때가 많다. 평정을 유지해주는 것 마음이 더 기운다. 나도 모르게 절실함과 하찮은 편안함 사이를 왔다 갔다 저울질하곤 한다.      


사람에 대한 여러 가지 데이터도 쌓인다. 과거 관계에서 경험했던 긍정적, 부정적 감정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주변에 있는 커플들에게서 들었던 즐거움과 괴로움까지 가세한다. 대체적인 관계에서 겪어야 하는 갈등에 속한 부정적 감정들을 가늠해본다. 과연 시간을 들여 감당할만한 감정인지, 계산기를 두드린다. 겪기도 전에 관계의 장단점을 예측하는 몹쓸 짓을 한다.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생각부터 많아지는 것도 중년의 특징이 아닐까.     


경험은 시야를 넓혀주기도 하지만, 웬만해선 상대에게 힘껏 내닫는 걸 막는다. 경험으로 무장한 선을 뛰어넘을지 말지는 ‘마음’에 달려있다. 마음은 가슴보다 머리를 따라갈 때가 많다. 중년에 연애가 한없이 어려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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