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농사 잘 지었다’는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하지 않을 부모는 없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정신을 담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인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두 딸이 있어서 부럽다.”란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고. 그 순간 영혼을 갈아 넣으며 자식을 키운 것을 인정받고 싶은 지인의 욕구를 미처 읽지 못해서 많이 미안했다. 하지만 딸들이 있어서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터라 눈만 끔뻑거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식 농사는 내 세대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농사’란 말에는 ‘수확’에 대한 기대감이 들어있다. 그래서 자식 농사 잘 지었다는 말이 부모에게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성취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자식을 낳아 키워보지는 않았지만, 자식을 키우면서 기쁨과 보람으로만 가득 찬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내 경우만 보아도 우리 부모님에게 내가 언제나 보람이고 기쁨일 리 없다. 어릴 때 까탈스러워 키우기 힘들었을 것이고, 성장기에 병치레가 잦아 고민 1순위였을 테니까. 이제 중년의 고집으로 무장하고는 내 멋대로 살아서 못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식은 부모의 머리와 마음을 지배하는 영순위 대상이다.
농사 잘 지었다는 말에는 어려운 일도 잘 겪어냈다는 격려와 응원이 포함되어 있다. 또 노후를 자식에게 일정 정도 의존하려는 오랜 관습을 슬쩍 엿볼 수 있다. 경제적 의미만이 아니라 심리적 의미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내 세대에는 자식 농사라는 말 대신에 ‘자식 리스크’란 말이 나올 정도다. 중년이 된 친구들은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 성심껏 부양하면서 노후 준비도 해야 한다.
2020년에 출간되어 화제가 된 책 <임계장 이야기>에서 임계장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가 38년간 공기업에 다니다 퇴직 후 생계를 위해 고속버스 배차원, 아파트 경비원, 건물 경비원 등으로 일하면서 쓴 노동 일지이다. 일터에서 벌어지는 아주 상세하고도 재밌으면서도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은퇴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의 경험은 노동보호법 사각지대에 놓인 임시 노무직을 대변한 외침이다. 건강하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잉여 노동력이 되어버린 장년이 젊은이들이 피하는 궂은일을 떠맡는다. 퇴직 후 절박한 경제적 처지를 이용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회적 구조를 다룬 책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저자가 38년간 공기업에 근무했다 말은 연봉이 많든 적든 안정적 직업군에 속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저자는 강도 높은 노동에 내몰린 ‘임계장’이 되었나?
그의 속 사정은 이렇다. 퇴직금을 중간 정산해서 집을 사는 데 보탰고, 모은 돈과 퇴직금은 딸 결혼 비용으로 썼다. 퇴직 후에도 여전히 집 대출금이 남았다. 그리고 아직 학생인 아들의 학자금 대출이 그의 몫으로 남겨졌다. 평생 성실하게 일했지만,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신을 위한 노후 준비를 하나도 할 수 없었다. 흙수저라고 자조하는 우리의 아버지의 초상이고, 또 우리의 초상이다.
늙어가는 그에게 남은 것은 갚아야 할 부채와 고된 노동이었다. 자식 부양의 짐을 책에서 다루지 않은 것은, 열심히 살아도 생계 걱정을 하는 공평하지 않은 사회 구조를 돌아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 성실하게 일해도 대출 없이 집 사기 힘들고, 빚 안 지고 자식 키우기 힘든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화두로 삼았다.
그래도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자식 부양책임을 조금만 내려놓았더라면 어땠을까? 모은 돈을 딸의 결혼 비용에 안 쓰고 노후 준비에 썼더라면, 학자금 대출금은 아들이 취업 후에 갚으라고 한다면, 극한 조건의 노동 시장에서 조금 거리를 둘 수 있지 않았을까? 시대가 변해서 청년들이 공부하는 시간도, 취직 준비 기간도 길어졌다. 당연히 경제적 독립 시기가 늦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부모가 감당하는 부양 의무 기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고소득 전문직이 아니라면 우리 모두의 고민이다. 만약 여기에 집안에 아픈 사람이라도 있다면 생활고는 더 심해질 것이다. 가족은 분명히 힘이 되는 울타리지만 동시에 짐이 될 수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자식 농사와 모순되는 말이 있다. ‘무자식 상팔자’. 요즘 말로 ‘자식 리스크에서 자유롭다’는 말이다. 중년의 비혼에게는 자식 리스크가 없다.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자식이 없으면 수입이 적으면 적게 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수입이 넉넉하면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수업료 때문에 망설이지 않으니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하게 된다. 자식을 부양하는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적, 물질적, 심리적 여유가 있다. 고소득 직군은 자식 키우며 노후 준비 걱정이 없겠지만, 모두 고소득 직군은 아니다. 나 역시 고소득 직군이 아니었지만 비혼이라 일 년에 한두 번씩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자식이 있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도 자식을 챙기느라 한두 주씩 집을 떠날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테니까.
물론 비혼으로 나이 드는 것은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거란 뜻이다. 이 생각이 늘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혼자 노년을 보내기 위한 이런저런 장치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둔다. 아플 때를 대비해서 보험은 필수이고, 일을 그만두었을 때 먹고 살 장치를 궁리한다.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다른 사람이 사는 방법을 보고 배운다. 정서적 노후 준비를 어떻게 할지 궁리 중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휘해 불안에 잠식당하는 것은 어리석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없으면 노후 준비 없이 노년을 맞게 된다.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미래보다 자식의 미래에 더 상상력을 발휘하고, 자식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시간과 돈을 쓴다. 그러다 보면 임계장처럼 열심히 살았지만 정작 노후 대책 없는 노년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 혼자 살아야 해서 노후에 대한 경각심을 더 팽팽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노후 준비에 적극적을 수 밖에 없다.
부양의 의무가 있든 없든 ‘노인을 위한 나라’에 살 수만 있다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다.
"상식이 통하고, 가난하고 배경이 없어도 불공정한 대우를 받지 않는 나라,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들도 인간적 품위를 보장받는 나라,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상생하고 누구나 일자리 걱정 없이 삶의 행복을 맘껏 누릴 수 있는 나라, 유토피아는 아니더라도 노력하면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조정진 <임계장 이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