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지인에게 물었다.
“나처럼 나이 많은 비혼에게 궁금한 게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점이 궁금하죠?”
“결혼한 분을 보면 결혼을 결심한 계기, 비혼인 분은 비혼을 선택한 계기가 궁금해요.”
대답을 듣자 고민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고민을 전혀 안 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 또래는 결혼과 비혼 선택지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할 기회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결혼을 부모님 세대가 주입한 필터를 통해 바라본 터라 결혼은 필수라는 분위기를 수용하는 편이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무시할 수는 없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결혼 열차에 탑승했다. 다수의 선택지를 고르며 '나이가 차서'.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니까' 하는 이유로 결혼한 친구들도 여럿이다.
같이 놀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자 나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갑자기 나는 혼자 남겨졌다. 특히 학창 시절 내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단짝이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 함께 갈 여행, 다가올 미래를 향한 꿈을, 친구는 내가 아니라 남편과 함께 했다. 처음 겪는 감정이었고, 상실감이었던 것 같다. 그 감정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앞에는 끝내야 할 석사 졸업 논문이 놓여있었고, 낯선 상실감을 오래 곱씹을 정신없었다. 내 앞에 넘어야할 논문이 없었더라면 우울의 터널에 오랫동안 갇혔을지도 모르겠다. 빨강머리 앤과 다이애나가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지만, 졸업 후에는 각자 다른 길을 갔던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돈키호테파'였지만 결혼이 제일 무서웠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출산과 양육도 무서웠고, 내향인이라 배우자의 가족과 부대끼며 사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이 아찔함을 흐릿하게 만들 정도로 콩깍지가 쓰인 상대를 못 만난 탓도 있다. 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감정보다 이성이 항상 앞서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이 곁에서 하나둘씩 사라질 때 나는 진로 탐색에 빠졌다. 지금도 진로 탐색을 하느라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마도 세상에 나올 때 진로 탐색이란 내려놓을 수 없는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태어난 것 같다. 아무튼 강물이 잔잔해 보여도 1초도 쉬지 않고 흐르듯이 살다 보니 중년이고 비혼이다. 다양한 삶의 형태 중에서 어떤 삶이 나와 맞는지 계속 탐색하고 직접 경험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었다.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통찰과 자신감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아주 가끔, 우주의 기운(?)이 내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면 외로운 감정이 부풀어서 나도 모르는 대상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외로운 감정은 찰나이다. 감정은 시시각각 변하니까. 나는 대체로 혼자 지내는 상태가 익숙하고 편하다. 서운한 감정도, 미워하는 감정도, 그렇다고 막 좋아 죽겠는 감정도 없이 미지근한 온도의 심장에 길이 들었다. 그리고 안락하다. 고백하자면 앞으로 혼자 사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와 맞춰서 사는 것이 더 두렵고 상상할 수도 없다. 가끔 연애할 때면 감정적 갈등과 마주하면 낯설어서 매번 달아나곤 한다. 나는 혼자 살기에 어쩌면 최적화된 사람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비혼이 체질이라고 할 수 있다.
비혼이든 결혼이든 선택을 하기 전에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면 만족도는 올라갈 것이다. 반면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모른 채 분위기에 떠밀려 선택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면 만족도는 하강 곡선을 그릴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건 이론이고, 인생을 시뮬레이션하며 계획대로 살 수는 없다.
내 또래는 대부분 자신의 적성을 모른 채 결혼을 선택했지만, 가족을 이루어 사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담은 글을 접할 기회가 종종 있다. 수강생들은 대체로 기승전 '가족 이야기'로 수렴되는 글을 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터전이 가정이고, 식구들과 이런저런 일을 지지고 볶는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가족은 자신의 우주이다. 글쓰기 시간을 통해 이를 발견하곤 한다.
소중한 기억의 중심에 가족이 있는 사실을 발견하는 글은 쓴 사람도 읽는 사람에게도 뭉클함을 산사하곤 한다. 얼떨결에 결혼해서 이어진 출산과 양육을 거치며 동거 동락한 가족이나 배우자는 툴툴대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깊은 사랑의 원천이다.
어떤 수강생은 혼자 보냈던 시간을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떠올린다. 가족 여행에서 새벽에 혼자 산책했던 시간을 가장 인상적 장면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결혼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혼자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그리워하는 것일 터이다.
반면에 결혼이 이런 건 줄 몰랐다며 적성에 안 맞는다고 말하는 지인들도 있다. 자식 양육만 끝나면 혼자 살겠다고 벼르는 지인들도 종종 만난다. 아마도 자신에게 건네는 희망 메시지일 것이다. 이 희망은 현재를 버티기 위한 마법의 주문이다. 반면에 결혼 후에야 뒤늦게 적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적성을 찾아가는 용기 있는 사람도 있다. 여행작가 김남희는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에서 자신이 혼자 사는 이유를 밝힌다. 그는 함께 사는 삶보다 혼자 사는 삶이 자신에게 더 맞는 옷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여러 가지 역할이 버거웠고, 그 역할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배우자와 헤어져서 혼자 사는 삶을 선택했다. 그는 결혼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보았고, 안 맞으면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을 보여준다.
나를 비롯한 비혼 친구들은 외로움을 깊이 타지 않고, 외로움이 찾아와도 다스리는 방법을 안다. 심리학에서 외로움은 자기가 자신을 만나지 않아서 생기는 감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잘 만나고 있는지, 아니면 혼자인 상태가 익숙해서인지, 외로움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 편이다. 한 친구는 코로나19 초기에 강력한 거리두기 시간에 거리두기가 체질인 것 같다고도 했다. 퇴근 후에 BTS 덕질하는 시간만 있으면 사무실과 집만 왕복하며 살아도 만족스럽게 잘 산다.
반면에 관계 중심인 지인이 있다. 그는 퇴근 후에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일주일 내내 촘촘하게 약속을 잡는다. 집에 혼자 있으면 외로움이 사무쳐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에는 혼자 사는 것을 거의 형벌처럼 느낀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짝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아 그는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연애를 반복한다. 사람에게서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지만 오히려 사람이 독이 되어 깊은 공허감에 시달린다. 사람 말고 다른 위안거리를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싶지만, 선뜻 말할 수 없어서 혼자만 생각하고 만다. 혼자 살 체질이 아닌데 반려자나 짝을 못 찾아서 혼자 산다면 매일이 버거울 것이다.
여러 가지 삶의 선택지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만족도는 개인이 놓인 환경과 심리적 상황에 따라 다르다. 성별의 문제도 아니고, 옳고 그름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어떤 삶의 형태든 극단적 특성만 있는 게 아니라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단점을 바라보는 태도가 삶의 만족도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때때로 괴로운 이유는 생각의 틀에 갇혀서는 아닐까? 한 가지 삶의 방식을 죽을 때까지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서 말이다. 물론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 자동차를 새로 바꾸는 일처럼 설레고 즐겁지는 않다. 원하는 대로 살려면 무거운 쇠사슬 같은 책임도 따라온다. 어떤 감정적 파도가 밀려와도 혼자 감당해야 하고, 미래에 쓸 에너지까지 땡겨써야 할 것이다. 결코 녹록지 않지만 그렇다고 안 맞는 것을 알면서도 죽을 때까지 맞추며 불만족스럽게 산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혼자 사는 삶을 택하든 둘이 사는 삶을 택하든 빛과 그림자가 있다. 컵에 물이 반이나 있네, 또는 컵에 물이 반밖에 없네, 하는 시선은 빛을 볼 지 그림자를 볼 것인지를 말한다. 내가 원하는 빛과 감당할 수 있는 그림자를 탐색 후 선택하면 만족스럽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완전한 삶이란 없다. 다만 자신의 삶에 만족한 사람과 불만족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부족한 부분, 불시에 기습하는 감정적 허기를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에 따라 삶의 만족도 곡선이 그려질 것이다.
아무리 기세 등등한 태풍도 지나가듯이 아무리 힘든 감정도 흘러가기 마련이다. 결핍을 건강한 방식으로 채울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이 발견하고, 때로는 결핍을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용기를 지니면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웃을 것이다. '기혼'이나 '비혼'의 프레임으로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어떤 삶을 사는지, 삶의 내용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 비혼이라면 극적이거나 결정적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꼬박꼬박 새해를 맞이했더니 중년이고 비혼이다. 나이 들고 비혼이라 받게 되는 사회적 시선은 분명히 있지만, 대체로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간다. 다만 가족 중심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더 쌓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