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알 Feb 06. 2020

곧 사라질 것들의 아름다움

영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을 통해 본 졸업과 입학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작은 것도 왠지 반짝여 보여.


졸업과 입학 시즌이다. 졸업과 입학은 현대 사회에서 커다란 통과의례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거나 사회인이 된다. 대학생이나 직장인이나 성인이다. 성인이 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널리 통용되는 규범을 따르도록 더 강도 높게 훈련받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학창 시절을 지나온다. 그 시간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 시간을 빠져나오면 비로소 보인다. 아련하다, 추억하다, 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시절의 향기가 영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에 스며있다. 




작은 시골 마을에 학생이 모두 6명인 학교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별 거 아닌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가 그 시절을 지나왔지만 어른으로 살면서 '잃어버린 시절'이다. 잃어버린 시절을 더듬으면서 우리가 잊고 있는 건 뭘까. 


학교에서 가장 어린 학생이 소꿉놀이를 한다. 수박주스를 만들어서 좋아하는 소요 언니한테 먹으라고 준다. 중학생인 소요(카호)는 더 이상 소꿉놀이를 하지 않는다. 소꿉놀이에서 규범은 상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박주스가 아닌데 수박주스라고 믿어야 하는 세계가 소꿉놀이의 세계이다. 상상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규범을 현실 규범과 구별해 나가는 과정이 성장 과정이다. 가상의 규범을 더 이상 믿지 않으면서 우리는 규범에 대한 가치를 재정립한다. 


마셜 B. 로젠버그는 <비폭력 대화>에서 우리는 길들여진다고 말한다.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지위나 권위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규정된 ‘올바른 사고방식’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내적인 동기에 따라 행동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따라 훈련되고 있다. "


중학생인 소요는 어른 세계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누군가에 대한 판단을 하고, 사물에 대한 판단을 한다. "우리 마을에는 촌스러운 이발소 밖에 없어."라고 말해서 이발소 집 친구를 실망시킨다. 도쿄로 수학여행을 가서 친구들에게 줄 선물로 '얼굴 하얘지는 비누', '뜬 머리를 단정하게 해 주는 스프레이'를 골랐다가 장바구니에서 뺀다. 친구들이 받으면 상처가 될 수 있는 선물들이다. 소요가 고른 물 속에는 소요가 친구들을 바라보고, 판단을 내린 암묵적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소요는 이렇게 커간다. 사회적 통념을 받아들이지만 아직 순수한 시선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경계선에 서 있다. 


오사와(오카다 마사키)와 소요가 수학여행을 가서 오사와는 친구들을 만난다. 오사와는 도쿄에 살다가 부모의 이혼으로 할아버지가 사는 시골 마을에 전학을 왔다. 도쿄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난 오사와는 장난꾸러기 남학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소요는 놀란다. 오사와 친구들은 오사와를 배웅하면서 커다란 시멘트 덩어리를 기념품이라고 던져준다. 오사와는 장난꾸러기 친구들이 준 선물을 버리지만 소요는 친구들이 준 선물이라서 그 무거운 시멘트 덩어리를 버릴 수 없다. 단순한 물건이 의미를 가질 때는 사람이 의미를 부여할 때이다. 소요에게 시멘트 덩어리는 곧 옛 친구 들이다, 어른에게 쓰레기로 보이는 것이 아이에게는 소중한 애착 물건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소소한 일들이 작은 마을에 일어난다.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만드는 일은 아이들의 큰 축제이다. 어른이 되면 제과업체의 상업성을 비판하는 의식을 갖는데, 비판받을 건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거품이 낀 소비성 문화이다. 마음을 전하는 능동적으로 일어나는 작은 소비는 학창 시절 꼭 배워야 할 훈훈한 마음이다. 포장만 거창해서 비싼 선물이 아니라 주머니에 쏙 넣을 수 있는 작은 수제 초콜릿이 받는 사람에게 닿았을 때, 전해지는 따뜻한 마음의 온도는 소중하다. 이런 작은 소비까지 싸잡아서 비난당하는 건 일상을 너무 건조하게 만든다. 


소요는 도쿄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게 된다. 도쿄로 진학하려는 오사와와 헤어질 시간이다.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하급생의 선망과 부러움, 나아가 경이로움도 불러일으킨다. 소요의 세일러 교복을 보고 중학생 친구들이 묻는다. 그런 교복은 어떻게 입는지. 중학교와 달라서 멋져 보이고, 입는 법도 어려워 보이는 교복을 봤을 때 호기심에 이어진 질문은, 아이들 다운 천진함이다. 착용이 어려워 보이는 교복을 입는 상급 학교 학생이 되는 것은 무언가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것처럼 보인다. 





중학교 교복과 고등학교 교복 사이에 소요와 오사와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오사와는 도쿄에 있는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마을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 함께 진학하기로 한다. 소요는 오사와에게 졸업과 입학 선물로 '키스'를 선사한다. 서툰 첫 키스는 사랑이 없는 키스로 분류되어 소요는 낙담하지만 키스가 아니어도 두 사람 사이에는 우정과 사랑, 그 어딘가에 서로의 마음을 두고 남은 학창 시절 동안 줄다리기할 것이다. 


곧 소요와 오사와, 그리고 작은 마을 학생들은 '그 시절'을 벗어날 것이다. 누구나 아는 학창 시절이 사라지길 고대했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는 걸, 먼 훗날에나 알게 된다. 이 사실을 그때 알았다면 아름다움을 미리 즐길 수 있었을까? 사라질 것의 아름다움을 그때는 모르고, 지금은 안다는 사실이, 쓸쓸하지만 위안이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한때가 누구에게나 있었나니...  

매거진의 이전글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