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파와 주님파
코로나 방역 수단에 대한 믿음
중국에서 코로나 감염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도 남의 일처럼 지켜보았다. 설마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중얼거리면서 느긋하게 소식을 접했다. 설마 했던 일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어 전국이 쑥대밭 같다. 더 암담한 사실은 이 시국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감염 확진자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어서 막연한 불안이 따라다닌다. 지하철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을 의심하기도 하고, 사람이 조금 많은 곳에 가게 되면 마스크의 코 조절 부분에 손을 올려 한 번 더 단단하게 조이곤 한다. 망망대해에 떠서 몸에 낀 튜브를 꼭 쥐는 기분으로 말이다.
코로나는 세계화 시대라는 것을 가장 명징하게 증명하고 있다. 공간을 초월해서 감염자 한 사람은 피보나치수열처럼 2차, 3차 감염자들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린다. 집을 나설 때 마스크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자극적 실시간 속보 경쟁으로 불안감은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마스크와 자발적 자가격리만이 답이라는 확신이 이성을 지배한다. 개인위생을 홍보하는 방송을 다큐멘터리 보듯이 진지하게 본다. 공공시설은 휴관하고 사람이 모이는 행사나 기획은 모두 취소되거나 잠정 연기되었다. 이성을 버리지 않고 개인의 삶을 유익하게 돕는 종교 집단은 종교가 없는 이들과 마찬가지다. 매주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마스크를 써야 하거나 예배를 온라인으로 대체한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보는 이들에게는 정부의 지침이 코로나 예방법이다. "생일 축하합니다"노래를 두 번 부르면 30초가 된다면서 손 씻을 때 속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마스크에 의지한다. 우리는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사태가 계속되어 마스크를 구할 수 없을 때를 미리 고민한다. 천 마스크라도 여러 개 사서 빨아서 써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마스크는 코로나에서 우리를 구원할 밧줄이다.
마스크의 대척점에 신천지를 비롯한 종교가 있다. 이들은 마스크파를 비웃듯이 집단 행사를 강행한다. 그들의 두려움은 병에 걸려 아픈 것이 아니라 신, 즉 하나님이 버려서 아픈 것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못하는 게 없다.
"여러분 중 바이러스 걸린 사람이 있다면 다음 주에 다 예배에 오라. 주님이 다 고쳐주실 것이다. 설령 안 고쳐주셔도 괜찮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늘나라며 우리는 죽음을 이긴 자들이다."(2020. 02. 24. 노컷뉴스) 한기협 회장이 한 말이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와 쌍벽을 이루는 발언이다. 이만희는 "신천지 교인을 괴롭히는 마귀의 짓"이라고 했다. 이성이 남아있는 사람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다. 우리는 바이러스에 걸리면 병원에 가야 하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야 병이 나을 것이다.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는다.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면 의사의 말을 따르는 착한 환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이성을 탑재한 우리 마스크 종파가 코로나를 이기는 법이다. 개신교와 신천지에서 주님은 죽은 후 하늘에서 만날 수 있으니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보고 죽음의 공포는 없다.
그들의 주님은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켜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믿는 것이 과연 주님일까?
그들은 주님의 전능함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사람들의 언어 기교에 현혹된 것이다. 종교의 존재는 어떤 사람에게 분명히 필요하다. 건전한 방향으로 믿으면 개인의 삶을 유익하게 도와준다. 하지만 왜곡된 전달자와 교주를 만나서 세뇌되어 집단 최면에 걸리면 그 파괴력은 엄청나다. 한 개인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에 많은 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위험에 빠뜨린다.
그들은 왜 종교라고 자처하는 포교자에 감정적으로 의지하게 되었을까? 절대적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영화 <더 헌트>는 인간의 집단 믿음에 대한 허상을 다룬다. 덴마크의 한 작은 마을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남자의 여자 원생이 선생님이 성추행했다는 거짓말을 한다. 선생님이 무안을 줘서 한 말인데 아이의 말에 유치원과 마을 사람 전체는 그를 성추행범으로 믿는다. 아이는 이성적 판단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자신이 한 말을 많은 어른들이 계속 되묻자 진실인지 아닌지 혼동한다. 아이는 자신이 한 거짓말을 점점 진실로 믿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말을 굳건히 믿는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한 말을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한 다리를 건너면 본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기정 사실화되어 간다.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믿기로 결정한 사람의 마음이 진실을 만들고 믿음을 만든다. 그 믿음의 단초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가끔 재미로 보는 사주나 별자리 점은 모호한 그럴듯한 말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모호한 말들에서 '용한' 단서를 발견하는 건 사주나 별자리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용하다는 점쟁이가 나한테는 전혀 용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점쟁이의 말에서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해 내려는 노력을 직접 하지 않으면 용한 점쟁이는 돌팔이가 된다. 교주나 위에 말을 한 한기협 회장은 바로 이런 인간의 심리를 가장 잘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추상적으로 말한다. 구체적인 말은 예언적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 말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에 맞는 단서를 발견하고 믿음을 구축한다. 그 믿음이 깨지면 흔들리는 정신과 영혼을 혼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절박함이 내재해 있는데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온몸을 내던진다. 물론 그들은 모른다. 자신만을 이익을 추구하는 한 개인이 그들의 소중하고 건강한 삶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평상시에는 마스크파이든 주님파이든 더불어 살 수 있을 것같은 착각을 한다. 하지만 코로나 같은 위기 상황이 펼쳐지면 주님파는 마스크파를 몰살시킬 수 있는 괴력이 있다. 주님파가 숫적으로 열세지만 무서운 이유이고, 마스크파의 욕을 먹는 이유이다. 한편으로 마스크파는 주님파의 맹목적 믿음을 궁금해 한다. 마스크파는 내면이 흔들려도 결정적 순간에는 이성줄을 놓지않아서 맹목적 믿음을 가진 주님파를 이해할 수 없다. 마스크파는 우리를 구원해 주는 마스크가 필요없는 날, 마스크에서 해방될 날을 기다린다. 그들의 진정한 해방은 더 이상 주님을 찾지 않게 되는 날인지 모른다.
이미지 출처 urbanbrush.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