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속도

걸으며 떠오른 생각

by 김남금

우리는 평소에 걷기에 대해 별 생각하지 않는다. 걷기는 두 발이 튼튼한 사람에게는 대기에 존재하는 공기처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한 살 무렵부터 두 발 보행을 시작해서 어떤 계산이나 노력 없이 저절로 되는 행동이다. 하지만 걷기, 특히 여성이 자유롭게 걷는 일은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역사적 흐름을 따라 서술하는 <걷기의 인문학>에서 저자 리베카 솔닛은 "걷기를 주제로 삼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보편적 행동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리베카 솔닛이 말했듯이, 내게 걷기는 인체의 자동 프로그램이 아니라 아니라 많은 생각과 도전이 필요한 행위이다. 3년 전 교통사고로 두 발을 수술하고 두 달간 깁스를 하고 풀었다. 다리 근육은 형편없이 약해졌고, 두 발 보행이 얼마나 정교한 인체 프로그램인지 매일 깨닫고 감탄했다. 무게 중심을 두 발에 고르게 두지 않으면 척추 통증이 생기게 된다. 두 발에 무게 중심을 균등하게 배분하려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경을 썼지만 머리로 계산해서 움직이는 일은 불가능했다. 인체는 톱니바퀴처럼 신경 하나만 어긋나도 통증이란 신호를 보낸다. 두 발로 걷는 것의 중요성은 두 발로 잘 걷지 못할 때 다가왔다. 결핍은 결핍 요소에 대한 존재를 부각한다. 두 발 보행에 제한당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두 발 보행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KakaoTalk_20200219_143109467_03.jpg @소백산, 한국


걷는 기능을 상실했다가 다시 찾으면서 일상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걷는 일은 곧 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면서 동시에 본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속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느긋한 관광이라고 할 수 있다. (...)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이다.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 눈앞에 펼쳐진 능선을 걷다 보면 문득문득 찾아오는 생각이 있다. 두 발로 걸을 수 있어서, 내가 걷는 걸 좋아해서 참 다행이다. 산 능선을 따라 난 둘레길 걷기를 좋아하지만 함께 걷는 이들이 좋아서 가끔씩 팔자에 없는 산행을 하기도 한다. 산행은 큰 결심이 필요하다. 아무리 완만해도 한국 지형의 산은 험한 편이기 때문이다. 산 봉우리까지 오르막은 기본이고, 자잘한 돌길인 너덜길,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진 등산로, 바위가 떡 버틴 암릉 구간도 때로는 만난다. 혼자서는 결코 가지 않을 길이다. 함께 걷는 친구들이 있어서 걸어볼 용기가 난다. 봉우리까지 오르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친구들은 응원과 격려의 말을 던지고, 이 말은 전진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삶의 원리와 같아서 흠칫 놀라곤 한다.


삶의 속도가 모두에게 같을 수 없다. 누군가는 암릉도 성큼성큼, 누군가는 오르막에서 쉬엄쉬엄 걸을 수밖에 없다. 또 누군가는 내리막 길에서 더 겁을 낸다. 흔히 오르막 길만 어렵게 여기는데 나는 내리막 길이 더 어렵다. 한 발을 돌 위에 두고, 다른 발을 다른 돌 위에 두면서 조심조심 발을 옮기면 일행들과 멀리 떨어지게 된다. 일행들과 멀어지는 시간은 두렵기도 하지만 걷는데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걷기 힘들 때 다른 사람이 손을 잡아줄 수 있지만 두 다리를 옮기는 궁극적 행위를 추진하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다. 만물의 이치가 이렇다. 살다 보면 즐거운 시간도 있고, 힘든 시간도 있지만 이 모든 걸 오롯이 경험하고 느끼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걸으면서 삶을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할지 관찰하고, 집중할 수 있다. 힘든 시기는 곧 지나갈 것이고, 내 몫의 행복이 아닌 것은 탐내지 않을 것이며, 내 몫의 행복에는 감사하게 된다. 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계절마다, 절기마다 날씨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의 풍경은 여러 요소에 따라 주관적 감상으로 다가와서 꼭 사람의 기분 같다. 우리의 기분은 주관적 요소에 휩쓸리고, 출렁거려서 여러 색의 스펙트럼을 갖는다.


KakaoTalk_20200219_143439663.jpg @소백산, 한국


지난주 소백산 비로봉에 다녀왔다. 칼바람이 유명하다는데 봄날 같은 날씨 속에서 얼었던 땅은 녹았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눈이 얼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능선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발씩 조심조심 움직였다. 구름을 잔뜩 머금은 하늘은 아주 잠깐 파란색을 보여주고는 곧 구름 떼를 다시 불러들였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늦어도 네 속도로 걸어.

친구들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