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도 뚫지 못하는 건 우리의 마음입니다?

by 김남금

어제 코로나19 확진자 동선을 알리는 문자 끝에 쓰인 문장이다. 바이러스는 과연 우리의 마음을 뚫지 못할까? 바이러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로 이제 지쳐가고 있다. 곧 진정되어 끝나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을 때는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매일 맹렬히 그 존재를 널리 퍼뜨리면서 바이러스의 사멸이 궁금해서 여러 곳을 기웃거린다. 뾰족한 답이 없다. 아시아를 접수한 바이러스가 이제 유럽과 미국까지 활동 무대를 넓히는 것 같은 불안만 늘었다. 어제 받은 재난 문자처럼 바이러스가 우리 마음을 뚫지 못해야 하는데 매일 마스크 이야기로 넘친다. 한 인터넷 카페에서는 100장을 가지고 있는데 더 사두려고 한다는 글을 보았다. 아니, 100장이나 있는데 도대체 왜??


나는 지난봄에 미세먼지 때문에 한 박스를 사서 거의 안 쓰고 보관해 두었다. 봄에 산 마스크로 여태까지 버티고 있다. 아주 아껴 쓰고 있다. 지하철에서 잠깐씩 쓴 건 말려서 한 번 더 쓰는 알뜰살뜰 정신을 발휘하면서 바이러스가 힘을 못 쓰기를 고대하고 있다. 마스크를 안 쓰는 것이 찝찝하지만 한 번 더 사용하는 것도 찝찝하다. 가는 곳마다 손 세정제로 손을 닦거나 물과 비누로 손을 닦는다. 집에 돌아오면 옷과 신발에 혹시라도 묻었을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 지난주에 소독수를 주문했지만 수요일인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업체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아예 전화를 안 받는다. 알코올로 무장하는 일상생활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집중된(?) 정보를 접하고 살다 보니 삶의 질이 몹시 낮아진 기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해서 불안을 키운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에게는 바이러스가 힘을 못 쓴다는 말을 믿는다. 하지만 눈에 안 보여서 잠복기에도 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보도에 최대한 외출 자제를 할 수밖에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슈퍼 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 참여하고 있지만 형체 없는 이 바이러스는 기세가 더 등등하다. 바이러스와의 장기전에서 심리적 격리는 심신을 지치게 만든다. 마스크 없이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시간을 보낼 자유가 없는 현실은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루에 손을 몇 번씩 씻어도 안심이 안 되고, 조금만 기침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피하게 된다. 혹시나 바이러스 보균자는 아닌지, 찝찝해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둔감해지는 게 아니라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작은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일상적인 일들과 단절되면서 시간이 많아졌다. 많아진 시간이 양질의 시간을 의미하진 않는다. 얼른 활기찬 3월을 찾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바이러스에 통제당하는 일상을 상상도 못 했다. 불안은 낯선 이, 모든 것에 대한 불신의 씨앗을 촘촘하게 심게 한다.


사실 바이러스뿐 아니라 모든 불안은 상상과 모르는 것에서 나온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바이러스의 성질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는데 바이러스의 실체를 모르니까 우리가 생활에서 할 수 있는 방역에 집중해야 불안 지수를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다. 어제 뉴스에서 마스크를 사려고 바이러스를 뚫은 기나긴 줄을 보면서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구근이 떠올랐다. 부의 상징으로 튤립 구근이 떠오르면서 금값만큼 비쌌던 튤립 구근. 튤립 구근은 화폐를 대체하지 못해서 결국 튤립 구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은 뜻밖에 마스크의 효용 가치를 극대화해서 매점매석도 등장하고 단속도 등장해서 마치 마스크와의 전쟁기 같다. 하지만 바이러스 시국이 끝나면 마스크는 곧 구하기 쉬운 상품이 될 것이고, 불안을 이용한 마케팅 매점매석도 바이러스와 함께 사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쯤일까? 시기를 알 수 있다면 우리의 불안과 마스크에 대한 과잉 행동은 멈출텐데...하염없는 기다림은 불안을 조장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도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불안을 통제할 수 있을 텐데. 튤립 구근이 화폐를 대체하지 못할 과거의 미래를 우리는 알고 있기에 튤립 구근을 그저 관상용 식물로 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