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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Mar 02. 2020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영화 <문라이트> 속에서 본 자아 정체성 형성 과정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 


<문라이트>를 넷플릭스에서 이제야 보았다. 2017년부터 아카데미 작품상 경향을 살펴보면 꽤 흥미롭다. 2017년 <문라이트>, 2018년 <셰이프 오브 러브>, 2019년 <그린 북>, 2020년 <기생충>으로 이어지는 계보이다. 일련의 공통점이 보인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비롯한 계급을 다루는 주제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미국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담론이 영화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말이다. 미국은 지독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소득의 재분배보다는 자수성가한 일종의 '영웅담'을 칭송하는 나라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신성한 가치로 숭배되어왔다. 서부 개척사는 미국의 건국신화이다. 추방된 유럽 백인들이 미국에 와서 땀과 때로는 피로 사유재산을 축적해서 큰 부자가 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칸트적 가치는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미국 건국이래 지배 이념이다. 트럼프는 이런 지배 이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을 지닌 국가에서 소외된 계층은 길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다. 마약과 폭력에 노출되고, 교육의 기회는 박탈당한다. 이 뿌리 깊은 차별을 이야기하는 영화들이 아카데미에서 논의된다. 영화는 허구의 예술이지만 현실에 기반을 둔 허구이기에 의미 심장하다. 계급과 인종을 다루는 영화가 작품상을 받는다고 사회적 불평등이 혁신되지 않지만 사회 불평등을 적어도 사회가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진출처 theguardian.com


왜 '달빛 아래서'인가?


샤이론은 "너무 울어서 눈물이 될 거 같다"라고 말할 정도로 내성적이다. 또래 집단 내에서도 늘 괴롭힘을 당한다. 그가 속한 사회는 그와 같은 인종이다. 어린 시절 그는 학교와 가정 내에서 겉돌고 혼자이다. 흑인이고 아빠는 어디 있는지 모르고, 엄마는 마약 중독자이다. 학교에서는 놀리면 그대로 당하고 때리면 맞는다. 샤이론은 비논리적인 빈정거림과 놀림에 맞서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학교는 내성적인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길에서 약을 파는 어른 남자를 만난다. 처음으로 그에게 무언가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었다.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고, 달빛 아래서 흑인도 파란색으로 보인다며 피부색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려준다. 하지만 왜 햇빛 아래서가 아니라 달빛 아래서 인가? 햇빛 아래서 피부색은 이미 부정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말일까? 어쩌면. 샤이론이 속한 사회의 한계를 에둘러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하지 못하는 사회적 현실


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한 친구는 사회 소외계층의 청소년을 상담하면서 가장 힘든 점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이라고 한다. 상담의 효과는 자신의 좌표를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고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기회가 균등하다고 말할 수 없는 점,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게 다 다르니까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할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어떻게 사회 불평등을 인정하라고 말할 수 있냐고. 상담의 딜레마는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이런 무력감이 찾아오곤 할 때마다 괴롭다고 말한다. 


영화의 두 번째 챕터 '샤이론'에서 사춘기 시절을 다룬다. 사춘기는 또래 집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늘 또래 집단의 괴롭힘을 당할 때 그의 곁에 한 친구, 케빈이 있다. 케빈은 샤이론에게 맞을 때 같이 때리라고 말한다. 강한 것처럼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강하다고 믿는 게 중요하다고.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라는 또래의 조언은 결국 샤이론을 소년원으로 가게 하고 그 후의 삶을 완전히 바꾼다. 출소 후에 샤이론은 학교가 아니라 거리로 나와서 마약을 파는 삶을 살게 된다. 마약 중독자인 엄마가 사는 방식을 미워하지만 엄마가 사는 방식, 교육에서 배제된 흑인은 살아가는 다른 방식을 알지 못한다. 샤이론의 성실함과 과묵함은 어떤 직업을 가져도 비슷할 것이다. 그는 단지 마약을 파는 일 밖에 알 수 없어서 직업으로 선택했다. 



 철저한 외로움과 정체성 


샤이론은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처럼 그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못한다. 유일한 친구, 케빈을 10년 만에 다시 만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실히 깨닫는다. 케빈과의 재회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지를 암시한다. 케빈 역시 출소했고, 보호감찰 중인 신분이다. 케빈은 교도소에서 요리 구역에 지정되어서 요리를 배웠고, 요리사가 되었다. 샤이론이 소년원에서 마약 판매상을 만나서 마약 판매상이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케빈은 샤이론의 변화를 놀라운 시선으로 보면서 자신의 내적 평화에 대해 말한다. 밤늦도록 지칠 때까지 일해도 푼돈밖에 못 벌지만, 별일 안 일어나고 아침에 해를 볼 수 있는 일이 좋다고 말한다. 남루한 집, 고된 노동 속에서도 폭력이나 마약이 없는 지루한 일상을, 케빈은 소중히 여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것이 사치인 사회적 약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힘겨움을 표현한 말이어서 무척 슬프게 와 닿는다. 


샤이론은 철저한 고독 속에 내던져진데 익숙하다. 어떤 상황이 익숙하다고 해서 적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상황이 특히 부정적인 상황이고 계속 노출될 수밖에 없다면 적응이 아니라 체념을 하게 된다. 미래를 꿈꾸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샤이론은 겉으로는 건장한 성인 남자이지만 발이 땅에 닿지 않는 환경에서 탈출하려는 의욕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한 상태이다. 유일한 친구 케빈에 대한 기억은 지금까지의 일생을 지배한다. 감성이 풍부한 시절에 케빈은 샤이론의 몸과 마음을 만졌다. 10년 만에 케빈을 만난 샤이론은 고백한다. 자신의 몸을 만진 유일한 사람이고, 곁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샤이론의 성 정체성은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육체적 욕구가 먼저가 아니라 정서적 결핍기에 감정을 나누었던 단 한 사람의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와 나누었던 교감을 잊지 못했다. 외로움이 모든 세포를 가득 채우던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샤이론의 선택은 결국 케빈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 줄 수 있는 친구에게.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란 말은 사회적 지지와 감정적 지지가 필요한 샤이론에게는 잔인한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 곁에 샤이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곁의 샤이론에게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는 거라는 말이 과연 바람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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