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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Mar 05. 2020

교황도 사람이다

영화 <두 교황> 속 두 교황의 우정 

종교의 생명력과 효용성  


나는 종교가 없고, 각 종교가 섬기는 유일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힘과 의지를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 힘은 믿는 편이다. 신의 존재는 믿지 않지만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기운(?)을 믿고 살아가고 있다. 종교에서 불편한 지점은 교리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일방향성인지 모른다. 특히 기독교는 성경을 지침으로 삼아서 명령과 복종을 강요하는 종교로 인식하고 있어서 거부감이 든다. 물론 아닐 수 있다. 많은 철학서, 인문학서와 나아가 자기 계발서들이 하고 있는 일이지만 이 책들은 명령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지 못한 대안을 제시하는데서 그치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내게는 성경의 대체재 역할을 한다. 또 이시이 유카리란 점성술가의 글을 열심히 읽는다. 주간 운세, 월간 운세, 년간 운세를 쭉 읽어왔지만 운세가 맞는 지는 잘 모르겠다. 불특정 다수를 위해 쓴 글이 맞는다고 믿는다면 이상하지 않나. 그러면 왜 읽나? 글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통찰력을 가지고 삶의 지혜를 비유를 통해 서정적으로 표현해서 읽는 동안 기분이 좋다. 이렇게 특정 종교에 대한 쏠림이 없어서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게 아니라 한없이 관대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교황의 지위에 대한 성스러움을 묘사할 때도 비신자가 보기에는 과장된 면을 찾아내게 된다. 역사적으로 가톨릭이 정치와 분리되기 전에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피도 많이 보았고, 신자들을 통치하기 위해 억압도 많이 했다. 교황과 왕권은 대립 관계에 있어서 왕권이 강화될 때 교황을 아비뇽에 유배시키는 아비뇽 유수도 일어났고, 움베르코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보듯이 성직자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대중의 문맹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종교는 그 생명력을 강하게 이어갔다. 이제 종교는 정치에서 거의 분리된 거 같지만 종교 집단 내에서 정치성은 여전하다. 베네틱토 16세가 콘클라베에서 선출되던 과정이 민주적이라며 한국 공중파에서도 중계해서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베네딕토 교황과 나란히 경쟁한 아르헨티나의 추기경이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만남으로 교황은 개인적으로 어떤 감정을 갖는지를 엿볼 수 있다.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는 교회와 교권


아르헨티나의 추기경은 사임을 하기 위해 베네틱토 교황을 만나러 오지만 뜻밖에 베네틱토 교황은 교황직을 사임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직자는 동의하지 않아도 종교에 몸 담고 있어서 오랜 관습적 위계에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인생에서 한 번 방문할까 말까 하는 시스티나 성당을 매일 드나들 수 있는 교황의 지위는 의무로 가득 차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늘 신과 대중에 의해 통제된 삶을 살아야 한다. 교황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우리는 종종 잊는 거 같다. 베네딕토 교황은 혼자 밥을 먹고,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행동은 모두 잊은 것 같다. 건강마저도 만보기로 통제받는 것 같았다. 교리에 충실하고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교황이었다. 교황의 눈에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추기경은 살아서 숨 쉬는 사람 같았다. 축구를 즐기고 피자와 콜라를 서슴없이 주문하고, 모든 것에 호기심으로 다가가서 그 어느 누구와도 금방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는 교회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보주의자이다. 이혼, 피임, 동성애에 관해 보수적인 교회의 시선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추기경이라는 직함도 거북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베네딕토 교황은 그에게 바로 그런 정신과 활달함 때문에 교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베네딕토 교황은 늘 혼자였다고 말한다. 신이 함께 있다고 추기경이 말하지만 교황은 신은 함께 웃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교황이 추기경과 보낸 3일 동안 잃어버린 개인의 취향을 깨닫는다. 피아노 연주를 할 때 느끼는 좋은 감정, 즐겁게 대화를 하면서 웃을 수 있는 것, 종교적 의무를 실천하는데 교황이라는 직함이 필요 없다는 것. 이런 것들을 잃어버린 교황은 신이 늘 함께 해서 지상의 행복을 누릴 거라는 사람들의 기대가 버거울 수 있다. 교황은 고백한다. 신이 자신에게 침묵한다고. 종교인들이 '소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가 만든 것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간절히 들여다보면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게 아닌가. 종교가 없는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내가 뭘 원하는지 열심히 들여다 보고, 고민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라고. 종교인들에게 소명은 열심히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지만 일반인에게 소명은 자신을 관찰하고 열심히 고민하는 게 아닐까. 



교황도 성직자 이전에 사회적 존재인 사람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남자가 쓴 글이 있다. "신의 말씀이 지닌 시적 분위기는 너무나 대단해서 모든 것을 침묵하게 하고, 모든 저항을 하잘것없는 불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선포된 요구와 굴종이 너무 심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는 성서를 옆에 밀어놓는 정도가 아니라 던져버려야 한다. 성서에서는 생활과 동떨어져 있으며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신이, 자유로워야 묘사할 수 있는 인생의 그 큰 범위를 복종이라는 단 한 가지 영역으로, 꼼짝할 수 없는 영역으로 한정하려 한다. 우리에게서 모든 기쁨과 자유를 빼앗은 그의 품 안에서 어떻게 인생이 더 나아진다는 말인가?"


교황이 성서를 던져버릴 정도로 억압당한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기쁨과 자유를 빼앗긴다고 느꼈던 것 같다. 교황도 가톨릭의 수장 이전에 사람이니까. 결국 교황직을 사임한 그는 보통 사람들과 더 가까이서 호흡하면서 사람처럼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길 기원한다. 성직자도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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