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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Mar 13. 2020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본 후 

코로나 때문에 극장에 가는 것을 자제 중이라 넷플릭스를 기웃거리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났다. 아름답고 이국적인 세계로 두 시간 동안 여행하는 기분을 갖게 해 주는 영화다. 일본은 만물의 정령을 믿는 나라이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많은 신사와 절을 만나게 된다. 신사와 절은 죽은 혼을 위한 곳이지만 실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안은 어깨에 달라붙어 짓누르고 있어서 초월적 힘을 가진 대상에게 불안을 덜어내기도 하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일본의 절에 가면 수많은 소원 편지가 나무에 매달려 있거나 소원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절은 큐슈 지방에 있는개구리 절이었다. 절 입구부터 안 까지 여러 개구리 상들이 있는 절이었다. 불상이 있는 절에 익숙한 터라 적잖게 놀랐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문화였다. 죽음은 가시적인 것이고 죽음 뒤에는 혼이 살아있는 걸 믿고, 혼에게 기원을 하는 풍습이 뿌리 깊어 보였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일본인들의 믿음의 근원인 '혼'들의 세계에서 한 어린 소녀가 겪는 모험담이다. 


탐욕이 지배하는 어른 세계로 입문 


치히로는 800만의 신들이 드나드는 온천장에 들어가게 된다. 온천장에 들어가게 되는 계기는 엄마와 아빠의 주체할 수 없는 식욕 때문이었다. 낯선 기운이 감도는 주인 없는 식당에 앉아서 음식을 먹기 시작한 부모는 허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 음식에 대한 탐욕으로 돼지가 되어 버린다. 길을 잃은 치히로는 하쿠를 만나 혼들의 세계, 즉 탐욕이 지배하는 세계로 들어간다. 이 세계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유가 없는 세계이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도 기껏 먹는 거밖에 할 수 없는 세계이다. 욕탕을 청소하고, 욕탕의 손님들에게 음식을 준비해 주고받는 돈은 마녀 하바바에게 돌아간다. 하바바는 건물의 제일 꼭대기,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다. 하바바는 치히로의 이름을 센으로 바꾸어서 치히로를 지배하려고 한다. 하쿠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혼령들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티켓이다. 


이름은 왜 중요한가?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이고, 다른 사람이 불러주어야 그 의미가 완성된다. 겁 많아서 보는 모든 것에 바들바들 떠는 작은 한 소녀인 치히로는 어른들의 탐욕 세계를 헤쳐나가려면 치히로가 되면 안 된다. 하바바의 명령대로 일보 후퇴해서 센이라는 이름에 적응하기로 한다. 이제 센은 온천장 곳곳을 볼 수 있게 된다. 맡겨진 청소 일을 해야 하고 오물의 신의 실체를 보게 된다. 인간이 편리함을 위해 사용하는 많은 물건들이 강에 던져져서 거대한 오물을 만든다. 코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는 악취가 결국에는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을 알게 된다. 센은 얼굴이 없는 정체 불명의 혼인 가오나시를 만난다. 가오나시는 문 밖에 있을 때는 존재감 없는 외톨이였다. 가오나시는 곧 혼들의 탐욕을 먹이로 삼아서 위협적인 크기로 변한다. 

   


탐욕의 적은 탐욕이 없는 순수함 


가오나시는 사금을 만들어서 혼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금붙이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온천장이 술렁거린다. 센만 빼고는. 센에게는 금붙이는 의미 없는 것이다. 황금을 돌같이 보는 센에게 물질은 바닷가에 있는 수많은 모래 보다도 의미가 없다. 센에게 의미 있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와 가족이다. 금붙이를 많이 소유한다고 해서 친구와 부모를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친구는 상대를 배려해서 먼저 마음을 열 때 생긴다. 친구를 얻으면 친구를 지키기 위해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금보다 더 소중하다. 센은 혼의 세계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치히로라는 이름을 잊지 않는 유일한 인간이다. 어린이의 순수함을 잊지 않은 이에게 자본과 탐욕은 무기력하다. 나아가 마녀의 마법도 쓸모없게 만들 수 있다. 



하바바의 애착 대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다. 하바바가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는 방법은 흥미롭다. 바깥 세계는 위험한 세균으로 가득 차 있어서 방 안에서 못 나오게 한다. 방 안은 아이를 위한 비싼 물건들로 가득하다. 하바바는 자신은 물욕으로 심술궂은 마녀가 되었지만 아이만은 순수한 세계에 가두어두려는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쌍둥이 언니, 신복조차도 더 강력한 힘을 소유하기 위해 없앨 수 있는 사악한 정신을 지녔지만 순수함에 대한 욕망만은 이룰 수 없다는 걸 아는 걸까. 자신의 아이가 순수함을 잃지 않기를 갈망하는 몸부림이다. 하지만 순수함에 대한 욕망만은 재물로도 이룰 수 없다. 


마법을 배우려는 하쿠의 욕망을 이용해 하바바는 하쿠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 하늘을 날고 바닷속을 헤엄치는 일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헤어질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일까? 하쿠는 센을 통해서 자신의 잃어버린 순수함을 깨닫는다. 센과 하쿠의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의 순수를 뒤돌아 본다. 이제 너무 늦은 걸까? 대가 없이 온몸을 던져 하쿠를 구하려는 용기를 가진 센을 보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말이 떠오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어릴 때는 "스스로 돕는 자"가 무슨 의미인지 절대 알지 못했다. 센은 소중한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 한다. 센이 최선을 다 할 때마다 초인적인 작은 힘이 센을 보호하고 도와준다. 외톨이 혼, 가오나시마저도 센과 동행하기를 원한다. 센은 탐욕스러운 허기를 가진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고,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하바바를 저주하지도 않는다. 센은 마법에서 벗어날 방법을 누군가 알려주면 따르려 할 뿐이고, 그 외에 얻을 수 있는 부와 절대적 힘에는 관심이 없다.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터널에서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구하러 지하 세계에 내려갔다가 아내를 구해서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센이 터널을 빠져나가는 동안에 오르페우스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오르페우스는 궁금증을 못 참고 뒤를 돌아봐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지만 센은 치히로로 돌아오는 동안 호기심을 누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데 믿음이 호기심을 이겨야하고, 이긴다. 치히로는 부모와 잠시 헤어져서 센이 되어 세상의 본질을 겪고 경험하면서 무엇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지 체험했다. 물욕과 탐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인류애를 보석처럼 두르고 있으면 영혼이 잠식당할 위험은 낮아질 것이니...치히로의 판타지 모험을 통해 잃어버린 동심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한때는 우리도 동심이 있었다는 걸, 기억할 수는 있으니 머나먼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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