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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May 29. 2020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바이러스  

영화 <컨테이젼>


영화적 상상력의 놀라움


때때로 영화적 상상력은 정교하고 정확해서 놀랍다.  <컨테이젼>은 박쥐를 매개로 돼지에게 옮겨지고 돼지를 먹는 인간의 손을 통해 전세계에 퍼진 바이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바이러스의 발생 원인으로 추측되는 감염경로와 감염된 후에 혼란에 빠진 인간 세계를 상상으로 그려냈다. 2011년 작품니까 무려 9년 전 상상력의 산물인데 놀랍게도 마치 현재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할 걸 알고 만든 영화 같다.


물론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바이러스의 특징에 관해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했겠지만 방역을 하는 모습, 급속도로 번져서 사회적 질서가 파괴되어 아수라장이 되는 모습, 미국이 개발한 백신을 받으려고 WHO 소속의 과학자를 인질로 삼는 중국의 안하무인격 행동 등등.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들까지 담았다. 감염자가 기하급수로 늘어나서 의료진은 파업을 하고, 환자들은 체육관에 누워있었다. 각국의 질병관리국 관리들이 이 영화를 참고해서 방역 대책을 논한 게 아닌가 할 정도다.


바이러스의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군상  


<컨테이젼>은 재난 영화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로 만들어서 스펙터클을 강조하고, 영웅이 나타나 위기를 해결하는 많은 재난 영화들과는 다르다. 예상치 못한 대규모의 재난이 발생할 때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누구 한 사람의 활약으로 재난을 극복할 수 없다. 또 재난에 놓여진 다수는 공포에 질려 비이성적으로 흥분상태가 된다. 그 결과 폭동과 약탈이 일어나기도 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기 전에 죽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우리가 지키기로 약속한 사회적 합의가 깨지는 건 한 순간이다. 게다가 잘못된 정보를 구원의 동아줄로 삼는다면 질서가 파괴되는 건 시간 문제이다.


<컨테이젼>에서 프리랜서 기자는  2백만 팔로워를 가진 블로그 인플루언서이다. 그는 자신의 감염과 치료약으로 개나리약을 투약하는 과정을 중계해서 항체를 갖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의 말에 많은 사람들은 개나리약을 구하려고 약국을 찾지만 떨어졌다는 말에 약국을 습격한다. 기자는 자신의 영향력을 무기로 삼아 백신을 개발하는 제약회사의 주가를 떨어뜨리겠다고 협박해서 돈을 받아낸다.  


한국도 코로나 바이러스 초반에는 비이성적 공격성과 잘못된 정보들이 돌아다녔지만 질본의 노력과 위기시 집단의식으로 다행히 이성을 되찾았다. 미국은 대통령 트럼프는 매우 비이성적인 영화 속 영웅주의가 현실에서 가능한 걸 보여주겠다는 일념이 있다. 의학적 근거없는 약 사용에 대한 위험한 발언들을 하고 있다. 트럼프를 보면 한탕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론, 이성, 질서와는 대립되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감정, 주목받으려는 관종주의가 질서를 무너뜨린다. 백신 개발에 대한 강한 욕구와 열망이 검증되지 않은 약 복용으로 이어졌는데 영화 속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잔악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뉴욕 타임즈는 미국에서 코로나19의 빠른 확산이 버스 기사와 버스 승객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이들은 도시가 계속 움직이도록 일하는 노동 계급인데 바이러스에서 안전하게 출퇴근할 차도 없고, 집에서 노트북으로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바이러스에 온전히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고 현장 근무를 하는 사람들이다.


유럽이 셧다운 했을 때 스위스에서는 특급호텔에서 고가의 사회적 거리두기 패키지를 내놓았고, 유럽의 한 유명 축구선수는 아예 섬을 사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기사를 읽었다. 우리가 선진 시민의식이라며 칭찬을 받았던 것은 택배기사들 덕분이다. 우리가 편안하게 집에서 물건을 받아서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때, 택배기사들은 밀집된 공간에서 일해야 했다. 며칠 전 쿠팡의 택배기사들 집단감염으로 확진자가 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열악한 외국인 노동자 거주 시설에서 집단감염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영화에서 냉장고는 비었다. 남의 집 창을 부수고 들어가서 냉장고를 털고, 총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거리는 쓰레기로 넘쳐난다. 쓰레기를 일주일만  수거 안 해가도 우리 현실 거리도 영화 속 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필요한 걸 잊고 있다. 우리가 바이러스를 피하기 위해 거리두기를 하지만 바이러스 공격에 계속 노출되는 직군이 있다.


포스트 바이러스


누군가에게는 무증상이고, 누군가에게는 경증이지만 기저질환자와 노약자에게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모든 병이 그렇듯이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는 코로나와 또는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바이러스와 살아가는 준비를 하도록 한다. 비대면, 비접촉이 일상적으로 되면서 일자리, 심리적 안정 등이 흔들릴 것이다. 바이러스가 물러가고 항체가 생겨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항체가 없는 탓이다.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백신이 개발되었고, 백신을 맞은 사람은 손목밴드로 서로 확인을 한다. 하지만 죽은 아내, 엄마, 동생, 친구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진정한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백신이 개발되기를 기다리는데, 마치 언제 익을지 모르는 감이 익어서 떨어지길 기다리는 기분이다.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야 하는 일상에는 긴장감이 옥죄는데 익숙해진 것 같으면서도 문득문득 낯설다. 화창한 봄날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을 보면 내가 영화 속에 들어온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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