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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Jun 09. 2020

12살 소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

영화 <가버나움> 리뷰


불평등을 바라보는 무력함 


상담사인 한 친구가 상담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은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내담자들의 무기력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회는 원래 불평등하니까 자신의 자리를 인정하라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친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가버나움>을 안 보려고 일부러 외면했었다.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되지 않은 난민들이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아이와 어른 모두 고통받는 걸 직시해야 하는 영화이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이다."라고, 판사이면서 글을 쓰는 문유석 작가가 말했다. 고통스럽지만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이다. 무지에서 깨어나 자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대체로 무력감을 느끼고 우울해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력감이 옥죄었다. 이 무력감이 축적되면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게 된다. 인식과 자각이 중요한 이유이다.


난민이 사는 세상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빈곤 포르노"라고 말하자, 감독은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글을 쓰는 카페에서 나와 세상으로 가서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세요. 영화에서 당신들이 보는 것은 현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깨어나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고통을 겪는지 봐야 합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나는 영화에서 강간 장면도, 실제 학대 장면도 넣지 않았어요." 


이 말을 읽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영화는 출생 신고도 안 되어서 12살로 추정되는 소년, 자인이 누군가를 죽여서 법정에 서게 된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인은 당돌하게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감독의 말대로 실제 학대 장면은 없다. 단지 자인이 한 방에 다닥다닥 붙어서 많은 형제, 자매들과 잠을 자고, 맏이라는 이유로 어른도 힘든 노동을 매일 끊임없이 하는 걸 보여준다. 깡마른 소년이 자신의 몸보다 무거운 가스통을 배달하고, 끼니다운 식사도 못 하고, 거리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다. 부모는 자식을 낳기만 했지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다. 난민의 신분이란 불법체류자로 사회에서 최약자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인의 부모는 11살 딸을 휠체어를 탄 남자 어른에게 시집을 보내고, 사는 게 지옥이라면서 매일 싸운다. 자인의 엄마는 먹을 게 없어서 아이들에게 설탕물을 먹이는 게 어떤지 아느냐고, 법정에서 판사에게 말한다.


기본적 의식주도 충족할 수 없는 삶


자인이 자신을 세상에 내놓은 부모를 원망하는 것도, 자인의 부모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돌봄도 주지 못 하는 일도, 다 이해가 간다. 가정을 꾸리는 게 지옥이라는 자인의 아버지 말에 자인의 부모를 비난할 수 없다. 자인은 세상에 아이를 내놓기만 하지 부모도 아니라는 생각에 가출을 해서 에티오피아 출신의 싱글맘 라힐을 만난다. 라힐도 난민으로 경찰에 발각되면 한 살쯤 된 아기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적어도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기본적인 관계에 자인은 끌려서 라힐의 집에 기거한다. 라힐이 체류증 위조 비용을 내려고 밤낮으로 일하는 동안 자인은 아기를 돌보게 된다. 불법체류자의 세계란 언제나 체포의 위협 속에서 지내는 것이다. 적어도 거리에서 노동하지 않고, 아기를 돌보는 최소한의 안정도 자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라힐은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가고 엄마 없이 남겨진 천진한 아기에게,  자인이 보호자가 되어버린다. 돌봄을 받아야 할 아이가 한 살 된 아이의 보호자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소재를 한 영화가 여러 편 있다. 대부분 사회적 구조를 보여주기보다 부모 개인의 삶을 더 부각하는 면이 있는데 <가버나움>은 아이의 삶을 보여주면서 부모의 문제점보다 사회적 구조에 초점을 두고 환기시킨다. 아이를 낳기만 한 부모를 비난할 수가 없다. 그들이 불법체류자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고, 그마저도 악덕 업주들의 이용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일을 해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들이 부모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짜 삶은 영화보다 더 혼돈


어린 소년 자인은 태어났을 때부터 아무 잘못도 없는데 사회에서 버려진 신분으로 살아야 한다. 희망은 하나도 없고, 언제나 폭력과 악독한 사기와 거짓에 노출되어 있다. 학교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했다. 의료 혜택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베이루트라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정글에 사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헤쳐나가 먹을 것을 얻어야 한다.  다행히도 자인은 감독을 만나서 제작팀의 노력으로, 현재 가족이 노르웨이에 정착해서 난생처음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과거의 끔찍한 삶에서 자인이 벗어날 수 있는 행운을 잡았지만 지금도 베이루트의 슬럼가에는 제2, 제3의 자인이 살고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하늘을 멍하니 보면서 커다란 눈망울이 붉어지는 모습은, 대본을 보고 하는 연기가 아니라 자인의 생생한 진짜 삶이었다.


우리는 가난은 개인의 게으름이라는 프레임에 세뇌되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고 프레임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니다.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모순 때문에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사실 이 문제는 현대에 시작된 문제는 아니다. 과거부터 오랫동안 있었던 문제이지만 우리는 잊고 있었고, "계급 사다리를 걷어 차기"가 힘들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결과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란 말들로 자조와 비난이 난무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소한 인식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옳은 정책을 지지하는 아주 소극적인 일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안전하게 살면서 세상의 어두운 부분에 무관심한 것도 일종의 죄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문유석 판사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또 "상기하기는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그 안에 자체만의 윤리적 가치를 안고 있다."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예수가 이주한 마을 이름으로 '혼돈chaos'이란 뜻을 가진 '가버나움'. <가버나움>을 직시하고 잊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윤리적 행위를 하고 있으며 윤리적 가치를 찾았다고, 위안을 삼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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