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흔적과 인생 수프, 하이델베르크

by 레알

항공사 마일리지를 사용하느라 프랑크푸르트 인아웃 일정이었다. 어둠 속에 안긴 시내로 들어가서 체크인한 후, 바로 쓰러져서 시체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햇살 속 프랑크푸르트를 탐색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하이델베르크로 독일 여행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겨울로 잰걸음으로 가는 11월, 파란 하늘이 맞아주었던 운 좋은 하루였다. 햇살이 두 팔 벌려 온몸을 안아주었지만 바람은 매서웠다. 시차 때문에 새벽에 일어난 탓에 눈이 빡빡하고 머리도 띵했지만,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가볍고 춤을 추었다. 피로라고 부를 수 있는 몸을 감싸는 노곤함은 반가운 것이었다. 일할 때 피로와는 결이 다른 피로였다. 낯선 도시에서 살짝 긴장한 채 서울과는 다른 공기 냄새를 킁킁거리며 들떴다. 이정표와 거리 간판에 쓰인 독어가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간, 비로소 여행자로 다시 태어난다.


한국에서 구매한 유레일 패스를 개시하려고 기차 출발 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역 근처를 산책했다. 이른 아침 장이 선 걸 발견했다. 골목이 살아있는 유럽 풍경에 다시 한번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하이델베르크를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하이델베르크 역에 내리니 극히 일부 장면만 화석처럼 뇌리에 박혀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성은 전쟁으로 파괴되어 폐허로 남아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규모와 지형 덕분이 아닐까. 만약 성이 온전히 버티고 서 있다면 지형을 온전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성벽이 서 있다. 독일에는 캐슬 로드castle road가 있을 정도로 성이 많다. 성은 군주의 힘을 과시하고, 그 힘을 지키기 위해 화려하고 아름답고, 위엄 있게 만들었다.


유럽의 성castle 역사는 잔인한 전쟁사이기도 하다. 늘 궁금했었다. 어떻게 그 많은 전쟁을 치를 수 있었나, 하고. 유발 하라리의 <극한의 경험>은 유럽 전쟁 문화사에서 그 답을 찾았다. 중세에 종교는 일반인의 정신뿐 아니라 육체를 지배할 수 있는 절대적 힘이었다. 신은 몸과 마음을 복종시키는 수단이었다. 즐거움도, 슬픔도, 고통도, 죽음마저도 신과 함께라면 견딜만했다. 전쟁터에서 장군은 신과 같은 정신적 존재였다. 장군은 신처럼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정신으로 집단(국가, 군주, 종교단체)에 복종해야 했다. 장군의 철의 정신에 일반 병사는 육체를 헌납해야 했다. 이런 역사를 좀 들여다보면 성의 아름다움이 무수한 생명의 땀과 피라, 그저 감탄만 하게 되진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성은 전쟁의 흔적을 조금 더 드러낸다. 유럽 문화는 승자의 기록이기도 해서 알면 알수록 마음이 썩 편하지만은 않다.


이렇게 클래식한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간다. 아마 동네 주민이 개와 산책하러 산에 올라가는 듯. 운전사 아저씨랑 주고받은 대화 내용은 모르겠지만.



성은 쾨니히스툴konigstuhl산 중턱(?)쯤에 있어서 먼저 푸니쿨라를 타고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성을 둘러봤다. 남의 나라 가면 이상하게 산 정상에 집착하는 집착녀가 되어버린다. 산 정상까지 푸니쿨라가 있는지 몰랐다가 표를 끊으면서 알았다. 매표소 맞은편 벽에는 푸니쿨라의 역사에 대해 써 두었는데 2세기쯤 전에 만든 푸니쿨라가 운행 중이었다. 두 번을 갈아타고, 역사 속 푸니쿨라를 타고 정상에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야 고소공포증. 그것도 좀 심한 편이라 역사 깊은 푸니쿨라는 덜컹거림이 심해서 내 의지와 다르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두 눈을 감고 안전 바를 꼭 잡았고, 푸니쿨라는 계속 덜컹거리며 서서히 올라갔다. 두려움 속에서 올라가는 시간은 꽤 길게 느껴졌다.



푸니쿨라가 움직이기 전 내부. 나무로 만들어졌고, 오랜 역사를 드러내듯 건들건들거리며 움직였다. 주문을 외웠다. 독일은 안전에 민감한 나라야. 그저 건들거릴 뿐 안전에는 문제없어, 하고. 사실 이것도 정보 없이 와서 무슨 산인지 쾨니히 스툴 역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알았다.


푸니쿨라에서 내리면 마을 전경이 다 보인다. 정상에서 보면 모든 게 작아 보이는 효과가 있다. 놓치는 게 많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다리도, 마을 골목도 그저 무리 속에 있어서 그 세세한 특징을 알아차릴 수 없다. 과연 모든 정상이 다 옳고, 좋은 걸까...


다시 푸니쿨라를 타고 하산해서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입장.

바람결에 따라 미루나무(?)가 가지를 움직이는 걸 보고는 흔들리는 나무들에 홀딱 반해서 사진을 엄청 찍었다. 가을가을한 하이델베르크.



성 안에 22만 리터를 담을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술통이 있다. 22만 리터가 얼만큼인지 짐작도 안 간다. 술통 위아래, 옆으로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술통이 있는 곳에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파는 카페가 있다. 여기서 인생 수프를 만난다. 꽤 추워서 계절 수프를 별 기대 없이 주문했다가 한 입 먹고는 즐거워지는 맛. 그 후 감자수프에 대한 환상을 가졌지만 이렇게 맛있는 감자수프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먹다가 저 세상 맛에 놀라서 숟가락 놓고 인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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