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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Jul 26. 2020

풍요의 늪에서 줍는 일

영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리뷰


택배 하나 받으면 언박싱을 하데 시간이 꽤 걸린다. 겉 상자부터 내용물의 파손을 막기 위한 각종 충전재를 제거하고 나면 드디어 본 상품과 만난다. 본 상품도 코팅지 상자나 비닐 속에 있다. 제조사가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한 자체 충전재가 들어있을 때가 많다. 언박싱을 하고 나면 비닐부터 종이, 테이프까지 쓰레기가 한가득이다. 이 많은 쓰레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니다. 하지만 언박싱의 쾌락을 잊을 수 없어 쓰레기의 행방에 대한 관심은 사라진다.  코로나19로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포장재 쓰레기의 한계치를 알리는 기사를 종종 본다. 하지만 이 사실을 곧 잊곤 한다. 포장이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물건이 훼손되었을 때 고객이 항의할 것에 대비하는 회사의 입장도 이해된다.


문제는 택배 없이 사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물건들은 모두 필요한 것일까? 근본적인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세일하니까 이건 사야 해, 언제간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있으면 편하겠는데, 간지 나니까... 등등의 저마다의 이유로 곧 쓰레기가 될 것들 사들인다. 사놓고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하는 물건도 많다. 버리기 아까워서, 사놓은 걸 잊어서... 가 이유이다. 리가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건 몇 가지 되지도 않고, 택배로 받지도 않는다. 마트나 매장에 직접 가서 산다. 택배 상자는 우리의 잉여 쾌락일지도 모른다. 쓰레기인 택배 포장과 잠재적 쓰레기인 상품이 주는 일회성 혹은 짧은 즐거움을 사고 있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이삭 줍기와 나>는 '나머지' 혹은 '쓰레기' 주변에서 주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농촌과 도시의 두 모습을 담는다. 감자 농장, 포도 농장, 사과 농장 등에서 수확을 하고 상품 가치가 없는 작물들은 버려진다. 특정한 곳에 가져다 버리거나 수확하지 않는 과일들은 땅에 떨어져 시들고 말라간다. 그 양이 어마어마해서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누군가는 지나친 풍요로 버리는데 누군가에게는 지나친 결핍으로 이 버려진, 상하기 직전의 농작물들이 중요한 식량원이 된다. 감자를 줍는 이들, 남은 과일을 따는 이들의 인터뷰에서 이들은 농장주가 허락하는 한도에서 잉여 산물을 얻는다. 대부분의 농장주들은 잉여 작물을 줍거나 따도록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바르다 감독은 밀레의 '이삭 줍기' 시절부터 있었던 줍기의 법전 해석까지 동원한다. 원래 줍는 행위는 사유지에서 일어났고, 상품성 있는 걸 줍는 게 아니라 너무 익어서 저절로 떨어진 것들을 줍는 건 위법이 아니었단다. 그럼에도 사유재산의 개념이 공고한 21세기 사회에서 줍는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 되곤 한다.


도시는 어떨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매일 쓰레기는 넘쳐난다. 명절에 하루만 쓰레기 수거가 안 돼도 쓰레기 수거장 밖으로 쓰레기가 넘쳐난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 가전제품을 쓰다가 신제품으로 바꾸고 버린다. 작동이 안 돼서 버리는 경우는 요즘 잘 없다. 쓰레기통만 뒤지면서 15년 동안 산 남자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는 냄새로 판별한다고 한다. 유통기한 넘긴 음식만을 먹고살았지만 탈이 난 적이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외국 동네에서 식료품 장이 선후 파장하면 엄청난 식재료 쓰레기가 나온다. 약간 시들어서 상품 가치가 떨어진 것들인데 그런 야채만을 골라먹고사는 사람도 있다. 빵은 빵집 쓰레기통에서 마음껏 먹는다. 한 남자는 생물학 전공을 해서 영양소까지 고려하면서 먹는다. 그는 쉼터에 살고, 버려진 것들로 살고 있지만 아프리카 이민자들에게 불어를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한다.


우리가 먹으면 탈이 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먹고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면서 감독은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버려진 것을 먹고 산다고 그들의 삶이 쓰레기인 것은 아니다. 상하기 직전의 고기는 얼른 요리해서 많으면 이웃과 나눠먹고, 고장 난 가전제품은 가져와서 고친후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판다. 이런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문득 풍요 속에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은근히 비춘다.


쓰레기를 이용해서 만든 예술품을 찾아간다. 버려진 냉장고는 다른 쓰임으로 업싸이클되기도 했다. 감독은 바늘이 없는 탁상시계를 집에 주워와서 바라본다. 시간이 사라진 시계라고 말한다. 예술의 탄생은 이런 식이다. 작동하지 않는 시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이다. 쓸모없는 것으로 볼지 '시간이 사라진 시계'란 영혼을 부여할 것인지. 또 하트 모양의 감자를 가져오기도 한다. 쓸모없다고 사람들의 홀대를 받는 모양이지만 심장과 닮은 감자들.



물건의 쓸모는 결정하는 사람의 시선에 달려있다. 문화는 사람들의 시선의 집합이다. 저 멀리 밀레의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버려진 이삭을 주워서 끼니를 이어갔다. 바르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 작업이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버려진 것들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려고 찾아다니고, 그들의 이야기를 줍고 이어서 만드는 영화 작업을 한다.


결국 버리는 일은 관심을 끊는 일이다. 속도가 빠른 사회에서 관심은 지속적일 수 없고, 속도를 따라 끊임없이 움직인다. 매일 블링블링한 광고를 보면서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탐한다. 우리의 채울 수 없는 허기는 더 빨리 관심을 놓아버려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린다. 관심을 잃고 버려진 운명의 물건에 누군가는 관심을 쏟아서 줍는다. 중고품이라면 끔찍하고 불결하다는 시선이 일반적인데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풍요의 늪, 실은 소비를 강요하는 분위기에 잠식당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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