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괴짜들의 날갯짓이 만든 세계관과 진짜 세상의 혁신

[둠의 창조자들]을 읽고 _ 트레바리

by 시공간

트레바리 독후감 중 기억할만한 것들을 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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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이머가 아니다. 게임을 한 지 정말 오래됐고, 중학생 시절 했던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 이후 제대로 기억나는 게임도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며 종종 혼란스러웠다. 게임의 문법이나 맥락도 낯설었고, 이 괴짜들이 벌이는 실험과 충돌은 이해되면서도 멀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읽은 이 책의 감상은 좀 파편적이다. 그래서 파편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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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조직

이 책을 읽으며 자꾸 떠오른 장면들이 있었다. 지난번 『하드씽』 때 독서모임 대화 중 언급했던 영화 <블랙베리>가 다시 생각났다. 처음에는 그저 좋아하는 걸 만들고 싶어 시작한 사람들이, 점차 조직이 커지고 외부의 시선과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변해가는 모습이 많이 겹쳤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 자체를 즐기던 사람들이, 회사가 커지면서 소외되고, 부딪히고, 싸워나간다. 그 변화는 조금 씁쓸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나도 그래서 조용하고 작지만 단단한 팀에서 몰입하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 자기밖에 모르는 괴짜들

내가 읽은 이 책은 단순한 게임 개발 이야기라기보다 창의성과 기술, 그리고 인간적인 결함이 얽힌 서사로 느껴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카맥과 로메로의 천재성에 감탄하면서도, 그들의 무모하고 무책임한 태도가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들이 소프트디스크의 컴퓨터를 차에 실어 몰래 가져가 자신들의 게임을 만들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어떻게 이렇게 치밀하면서도 즉흥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과 동시에 ‘이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이 몸담았던 조직이 무너지더라도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 문화로서의 게임

그러면서도 나는 게임이라는 것, 그리고 게임 산업이 지닌 문화적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게임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하나의 세계관을 창조하고, 사람들을 그 세계에 ‘참여’시키는 매체였다. 영화나 드라마가 보여주는 가상의 세계를 게임은 ‘살아보게’ 한다. 다만 그 세계가 굳이 어둡고 폭력적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몰입과 감각적 경험이 더 강력한 문화적 임팩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실 이들의 게임이 그렇게 어둡고 폭력적이었는지는 플레이해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


### 오픈소스

카맥은 지식이란 과거의 축적 위에 세워진다는 점을 인정했고, 특허 제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둠과 퀘이크의 소스코드를 오픈소스로 공개하며 기술 독점 대신 공유의 가치를 택했다. 그 선택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기술자이자 창조자로서의 책임감이 담긴 행동처럼 느껴졌다.


### 나비효과

그리고 이건 책과 상관 없는 조금 엉뚱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작은 아이디어와 기술적 실험이 어떻게 커다란 산업과 문명의 방향을 움직이는지를 생각했다. 처음엔 단지 몇 명의 괴짜들이 더 빠른 프레임, 더 나은 그래픽, 더 실감나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그 집착은 게이머들에게도 전염됐다. 더 나은 게임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컴퓨터를 바꾸고, 더 비싼 그래픽 카드를 기꺼이 구매했다. 고사양 게임은 하드웨어 수요를 끌어올렸고, 그래픽카드 제조사들은 기술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엔비디아가 나타났다.


실시간 그래픽을 위한 GPU는 점점 병렬 연산에 최적화되었고, 그 구조는 오늘날 AI 학습에 이상적인 토대가 되었다. 무어의 법칙이 멈춰 선 시대, CPU는 벽에 부딪혔고 GPU는 뜻밖의 문을 열었다. 원래는 게임을 위한 것이었다. 더 생생한 장면, 더 빠른 프레임, 더 멋진 이펙트를 위한 연산. 하지만 그 집착이 만들어낸 수요가 시장을 키우고, 병렬 연산 능력을 싸게, 널리, 안정적으로 보급했다. 게임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그렇게 준비된 기술은, AI라는 전혀 다른 꿈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결국 도파민이 의도치 않게 또 한번 '지능을 여섯번째로 혁신' 시킨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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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이 세계에 익숙하지 않지만, 이 책은 나로 하여금 게임이라는 문화를, 기술의 진보를, 그리고 창조의 빛과 그림자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종종 게임 시장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이라도 플레이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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