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시간을 거스르는 경험을 한다.
언제는 해가 서쪽에서도 뜬다고 하더니 또 무슨 얘기인가 싶겠지만 비행을 하다 보면 실제 벌어지는 일이다.
1월 1일 오후에 인천공항에서 이륙해서 미국 서부에 착륙하면 그곳의 시계는 1월 1일 오전을 가리킨다. 알래스카로 가는 비행은 더 극적이다. 1월 1일에 출발했는데, 하루 전인 12월 31일에 착륙하기도 한다.
이는 태평양 상공에서 날짜변경선을 넘으며 하루를 빼기 때문이다. 이것을 반전장치로 활용한 유명한 문학작품이 <80일간의 세계일주>다.
여러분이 이 작품을 떠올릴 때 동물들의 세계 여행이나 성룡의 액션이 먼저 생각난다면 어쩌면 이 소설의 진가를 아직 만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 각색된 동화나 영화를 먼저 접하면 원작을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만화로 듬성듬성 본 <빨간머리 앤> 때문에 원작 <Anne of Green Gables>을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빨간머리 앤>은 한 권짜리 이야기가 아니다. 소녀시절의 앤부터 할머니가 된 앤까지 이어지는 시리즈물로 마치 ‘앤 연대기‘와도 같은 스케일의 대작이다. (아 그리고, 앤은 길버트와 결혼한다.)
다시 <80일간의 세계일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영화에서는 성룡이 분한 파스파르투의 액션이 중심이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필리어스 포그다. 그는 머릿속으로 80일 이내에 지구 한 바퀴가 가능하다고 생각되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기는 행동파인 동시에, 변수까지도 계획에 포함하는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다른 이의 실수에는 한없이 관대하다는 점인데 그의 계획에는 실수조차도 이미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의도치 않은 경험에서 얻는 영감을 얻는 것을 사랑할 정도로 개인적인 일에는 한없이 P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균형을 위해 4년째 플래너를 만들어 쓴다.
기록할 때만큼은 필리어스 포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