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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여행기 #3 베네치아, 이탈리아

MANUFACTUS and SCRIBA

by 너일론

MANUFACTUS and SCRIBA

베네치아, 혹은 베니스라고 불리는 이곳은 이탈리아 북동부의 뻘밭에 말뚝을 박아 올려 만든 인공섬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얼마나 나무말뚝을 박았으면 이 무거운 석조건축물들이 무너지지 않고 몇백 년을 버티고 있는 걸까? 실제로, 살루테 성당을 건축할 때는 110만 개의 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17세기에 그런 공사를 했다니 실로 엄청난 일이었을 것이다.


커버이미지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인 리알토 다리 위에서 찍은 모습이다. 그 옛날 무역을 위해 배를 타고 베네치아에 입성했을 옛 뱃사람들은 좁은 수로를 운항하다 리알토 다리를 지나며 펼쳐지는 베네치아의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GPS도 자꾸 신호를 놓치는 좁디좁은 골목길을 걷다 리알토 다리에 이르면 갑자기 시야가 확 넓어지며 압도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의 빈곤한 리액션 주머니는 '우와!' 밖에 꺼내놓지 못하지만.


IMG_2879.jpg?type=w773 리알토 다리


낯선 도시에서 문구점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구글맵에서 'Stationery Store'를 검색하는 것이다. 베네치아에도 수많은 문구점이 나오는데 대부분 분위기는 비슷하다. 색색의 가죽표지로 된 노트들, 딥펜, 만년필, 글라스펜들, 그리고 실링왁스들을 판매하는 문구점이 많다.


다만 지도상의 문구점과 실제 위치를 찾기는 대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첫 번째 이유는 골목이 워낙 촘촘하게 이어져있어서 GPS도 자꾸 길을 잃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간판을 알아보기 어려워서다. 상점 유리문에 명함 크기 정도로 가게이름이 적혀 있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문 앞까지 가지 않으면 이름을 읽기 쉽지 않다. 과거의 모습을 최대한 해치지 않으려는 노력이리라.



겨우겨우 오늘의 문구점인 마누팍투스(Manufactus)에 도착했다.


Manufactus Venezia

MANUFACTUS

Calle de le Bande, 5275, 30122 Venezia VE, 이탈리아


헤매지 않는다면 산마르코 광장에서도, 혹은 리알토 다리에서도 도보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베네치아 여행의 묘미는 길을 잃는 경험에 있다.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길을 헤매다 우연히 마주치는 상점에서 당신의 취향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Mabufactus의 딥펜 세트

마누팍투스의 딥펜 세트다. 이곳의 분위기는 마치 호그와트의 문구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풍스럽다.


펜촉이 종류별로 동봉되어 있어 캘리그래피를 하는데도 유용할 것 같았다. 가격은 28.5유로. 우리 돈으로 대략 4만 원대 초중반의 금액이다.

Manufactus의 글라스펜

베네치아는 유리공예로도 유명하다. 베네치아의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색색의 수많은 유리제품들도 만날 수 있는데 본섬 바로 옆에 있는 무라노 섬에는 유리공예 박물관도 있다고 한다.


펜촉이 유리로 만들어진 딥펜인 글라스펜도 있다. 딥펜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촉의 가는 홈에 잉크를 머금어 쓰는 방식이라면, 글라스펜은 유리로 된 촉 자체에 홈이 돌아가며 나 있어 잉크를 머금을 수 있다.




Scriba Venezia

SCRIBA

Salizada S. Lio, 5728, 30122 Venezia VE,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두 번째로 소개할 문구점은 스크리바(Scriba)다. 원래 방문하려던 곳은 아니었는데 리알토 다리에서 마누팍투스 가는 길에 발견했다. 마누팍투스와는 불과 75m 떨어져 있다.


입구부터 색색의 실링왁스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Scriba의 글라스펜

한쪽에는 엄청난 디테일의 글라스펜이 있다. 가격은 13.9유로로 의외로 착한(?) 편. 우리 돈으로는 2만 원대 초반이다.


오페라 배우들의 의상이 떠오를 정도로 화려한데 왠지 모시고 살게 될 것 같아 사 오지 못했다. 사진을 보니 하나 정도는 들여올 걸 싶다.

Scriba의 딥펜

마누팍투스에 펜촉이 여러 종류인 딥펜 스타터 세트가 있었다면 스크리바에는 깃털로 된 딥펜이 있다.


이걸로 쓰면 왠지 대문호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멋진 펜이다. 어렸을 때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깃털로 쓰는 줄 알고 비둘기털을 구해 칼로 홈을 파고 써보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

Scriba의 실링왁스

실링왁스들의 종류도 굉장히 다양했다. 알파벳도 필기체까지 구비되어 있었고 색색의 왁스들이 눈길을 끈다.


뒤쪽으로는 색색의 가죽노트들도 보인다. 가죽노트들만 파는 문구점도 있었는데 미처 기록해오지 못했다.

Scriba Venezia

이제는 손편지조차 귀해진 시대다. 하물며 실링왁스라니. 사실 이런 고풍스러운 취향은 실용과는 거리가 멀다.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종이를 고르고, 딥펜에 잉크를 찍어 편지를 쓰고, 봉투에 실링왁스를 녹여 인장을 찍는 행위. 이렇게나 비효율적인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얼마 전 읽은 책에서 답을 얻었다. 굳이 들이는 수고는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일부러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행위는, 마음에 그것이 자리할 공간이 남아있다는 뜻이리라.


효율과 속도가 미덕이 된 사회에서 굳이 수고로움을 감수할 줄 아는 일. 그것이 외부의 것들에 내 공간과 에너지를 다 빼앗겼을 때, 번아웃의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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