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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황 Jul 10. 2019

Allow Natural Death

Do Not Resuscitate

"아기가 많이 아파요. 곧 죽을 수도 있어요. 심폐소생술을 원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지쳐있고 무서움에 떨고 있는 부모를 만났다. 아기 환자가 많이 아프고 곧 죽을 지도 모른다고 혹시 심장 박동수가 떨어지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면 가슴을 누르고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약을 줘야 하는 지, 아니 주고 싶은지를 알아보는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의사다. 매일 갓난아이들이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집에 가는 순간까지 책임지고, 혹은 아주 가끔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책임지는 신생아 중환자실 의사다.


나는 소위 블랙 클라우드라고 불리는 운이 나쁜 의사다. 나만 병원에 들어가면 멀쩡하던 환자의 상태가 나쁘게 변하거나 아픈 환자들이 들이 닥치거나 심한 경우 급작스러운 어떻게 보면 당황스러운 죽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수련의 때부터 이어온 나의 악운의 구름, 먹구름은 나의 머리 위를 떠돌며 아직까지 나에게 많은 배움의 기회를 또 많은 눈물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런 배움의 기회들이 나를 좀 더 나은, 좀 더 경험이 많은 의사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사람으로서 또 아이가 있는 엄마로서의 마음의 고통은 심히 크다.


내가 수련의였을 때 머리가 하얀 교수님께서 " 아이가 있으니까 슬픔이 배가 되지 않아? 다른 아이들이 아파서 죽을 때 말이야." 라고 물어봤을 때 '난 원래 동정심이 많고 공감력이 좋아서 아이가 없을 때도 같이 슬퍼했는데...'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백발의 힘은 대단하다. 아이가 있고 나서부터는 내가 느끼던 그 슬픔은 지금의 슬픔의 반의 반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울던 엄마들의 얼굴 하나 하나 지금 내 앞에 있는 것 같이 다 생생히 기억난다. 그들의 부르짖던 소리와 눈물로 범벅된 얼굴들. 그냥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속에서는 뜨거움이 목 끝까지 솟아 오른다. 모든 죽음에 매번 우는 내가 의사로서 약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했다. 나의 멘토는 매번 우는 나를 안아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 네가 만약 모든 죽음에 매번 슬퍼 하지 않는다면 이 일을 그만 두는 게 맞을 거야." 그 말은 매 때마다 우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또 위로를 넘어 내가 어쩌면 좋은 의사라는 아니 어쩌면 괜찮은 의사일지도 모른다는 안심이 들게끔 해주었다.


갑작스러운 죽음도 무척이나 힘들지만,  대부분의 아기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아니면 죽기 몇 주전 몇 일전 몇시간 전부터 우리는 죽음을 직감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우리의 의학지식과 또 다양한 의료 장비 테스트를 이용해 대부분 아기들의 병원 코스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물론 가끔씩 놀라운 결과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슬프게도 우리들의 의학적 소견은 현실이 되고는 한다.


태어나기 전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세상이 나오자마자 곧 죽을 거라고 기도 삽관과 심폐소생술을 원하는지 물어본다. 그래도 나의 전문적인 소견은 아무것도 하지않고 그냥 아기를 보내주는 것이라고 배가 부른 산모에게 조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목숨을 부지시켜 달라는 부모들. 그들에게 다시금, 가장 큰 사랑은 보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내 얼굴을 빤히 보는 산모와 그녀의 가족, 남편을 만나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매번 곤욕이고 고통이다.


물론 자주하는 만큼 이런 대화의 한 부분 한 부분이 가족을 설득할 수 있는 나의 경험의 축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심리적으로 큰 마음의 짐이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도 엄마이기 때문에 더 힘들다고 말하는 건 어떻게 보면 핑계일 수도 있겠다. 대화를 하면서 울컥 울컥 하는 건 나도 한 명의 사람이라는 걸 넘어 엄마이기 때문이다.

상담이 끝나면 바로 결정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하지만 생사가 곧 갈릴 거라고 이제 언제라도 곧 죽을 수 있는 아기들을 그냥 안고 심폐소생술 없이 가능하다면 삽관 튜브를 빼고 그냥 고통 없이 죽게 하는 게 낫다고 내 전문적인 소견이자 개인적인 소견을 말하면 보통의 부모는 더이상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아기를 안고 죽음을 기다린다. 바로 죽는 아기도 있지만 내가 심장 소리를 일이분간 듣고 사망선고를 내리기 전까지 아기가 의학적으로는 서류상으로는 죽은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시간을 주는 편이다. 부모가 아기의 마지막을 지켰다고 마지막으로 몇십분 또는 한시간을 보냈다고 기억할 수 있게끔 배려해 주는 편이다. 만약 부모가 병원에 없으면 나는 최선을 다해 아기의 심장을 뛰게 한다. 그리고 부모가 도착하면 사망선고를 내린다. 부모가 아기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그 무거운 짐을 지워주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의사이기전에 한 엄마이고 또 현생을 살아가는 한 시대의 동료 인류이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아기들이 살 수 있도록 돕는 것도,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가족들이 힘든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나의 임무이다. 이 일을 계속 하는 한 이런 대화들이 앞으로도 자주 있고, 마음의 짐들이 차곡차곡 내 마음의 곳간에 쌓일 것이다. 제일 힘든 순간에 아기들을 또 그들의 가족들을 도와줄 수만 있다면 이까짓 내 마음의 짐쯤 이야 저 멀리 넣어 두고 내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한 사람으로서 엄마로서 의사로의 소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쌓여 언젠가 나를 조금 더 나은 의사로 만들리라는  작은 희망으로 오늘도 나는 웃으며 병원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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