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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황 Sep 19. 2022

미숙아를 연달아 낳은 엄마

첫째는 하늘로 둘째는 집으로


의사마다 마음에 두고두고 남는 환자가 있다. 의사 한 명당 보는 환자 수는 셀 수 없이 많아서, 환자들과 가족들은 의사를 기억할지언정, 의사들은 환자 한 명 한 명을 다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다. 오늘만 해도 우리 병원 신생아 중환자실 환자 수는 78명. 슬프지만 78명의 환자와 백 명이 넘는 부모를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일 년에 보는 환자 수와 그들의 부모 수는 어마하지만 밤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환자 중 유독 내 가슴에 남아서 아직도 나와 함께 살아있는 한 아기가 있다.

“이 산모 아무래도 출산시켜야 할 것 같아.”

산부인과 의사가 걱정스럽지만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기가  24주야. 개인적으로 24주에 나와서 건강하게  크는 아기들 많이 봤어. 오늘 수술할 거야.” 

아기의 엄마는 평소 앓던 지병이 임신의 영향으로 점점 심해졌다고 했다. 엄마의 건강이 우선이다. 아기는 고작 24주를 넘긴 법적으로도 의료적으로도 살려야만 하는 아기였다.  산부인과 의사는  좋게도 초미숙아 병동이 따로 있는 우리 소아병원 바로 옆에서 산모들은 돌보았다. 당연히 다른 곳에 비해 경과가 좋을 수밖에 없다. 초미숙아들만을 위해 따로 공간을 만들고 팀을 만들어 교육하고 노력이 그녀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 멘토였던 동료 교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고 했다. 아마도 나보다 20년 이상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자신은 산부인과 의사를 설득해서 분만을 최대한 늦췄을 거라고 했다. 산부인과 의사가 결정을 바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시도는 했어야 했다. 아니, 우리는 이 분만을 막았어야만 했다. 아기가 조금 더 클 수 있도록, 좀 더 기다렸어야 했다.

아기가 처음 제왕절개로 세상에 나왔을 때 우리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아기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았다. 물론 엄마의 건강 문제로 태어난 아기이기에 예상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압력과 산소를 코로 넣어서 호흡을 도왔다. 하지만 아기는 흉골이 뚜렷이 보이도록 가쁜 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결국 기도삽관이 필요했다. 다른 24 주 아기들보다 조금 더 작은 기도였다. 그래도 손쉽게 기도삽관을 했다. 오백 그람 정도밖에 안 되는 아기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왠지 기도 삽관 튜브가 한쪽으로 뻗쳐 있었다. 워낙 작은 아기라 그런가 보다 했지만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엑스레이처럼 까만 의심이 들어 엑스레이 한번 더 찍었다. 초미숙아는 간혹 기도 삽관 중 기도 파열이 일어난다. 살짝만 더 세게 밀어 넣어도 기도 삽관 튜브는 아기의 가냘픈 기도를 뚫고 나갈 수 있다. 다행히 걱정하던 기도 파열은 아니었다.   

그런데 호흡기 치료사들이 바쁜 나를 또 급하게 불러댔다.

“기도 삽관 튜브에 평소에 잘 내려가는 흡입 관이 도대체 내려가질 않아. 뭔가 잘못됐어. 이상해.”

이런 경우는 자기 경력 20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눈을 부라리며 눈알을 굴려댔다. 나도  머리를 최고의 속도로 굴렸다. 그러나  이유를 생각할  없었다. 아기가 엄청나게 작았고 유난히 기도가 작았다. 그래서 그러려니 했다. 크게 흡입이 필요하지 않은 아기였다. 한번 지켜보자고 했다. 호흡기 치료사는 납득이 가지 않은  다시 한번 눈을 크게 굴리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기의 기도 삽관 튜브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그날  같이 당직을 서고 있는 다른 교수님은 오래된 나의 멘토로 소위 말해 우리 병원 최고의 의사였다. 모든 의료진의 칭송하는, 제일 경험이 많고 가장 똑똑한 교수였다. 부리나케 달려온 교수님은 크게 문제가 있는  같지 않다며 다들   난리 법석였는지 모르겠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저 호흡기 치료사들이 24주 미숙아를 몇 번이나 봤을 것 같아? 아마 별일 아닐 거야 걱정하지 마.”

그의 말에도 간호사들은 난리였다. 간호사들은 나를 아기 곁에 묶어두고 싶어 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확보가 잘 되어야 하는 데 뭔가 불길한, 뭔가 이상한 기도였기 때문이다. 행여나 기도삽관 튜브가 실수로 빠지거나 아기의 호흡 상태가 불안정해질까 봐 나를 붙잡아 두려고 했다. 다행히 다른 응급상황이 없어서 나는 아기 곁에서 차트를 쓰고 환자 상태를 계속 살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응급상황이 있었다. 나는  당시 모유수유를 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태어난 24 초미숙아 때문에  그의 불안정한 상태 때문에 8시간 동안 유축을 하지 못했다. 젖이 가득  가슴은 압력으로 참을  없는 통증을 만들어냈다. 가능하면 3시간마다 하는 유축을 8시간 동안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나의 아픔 따위야 환자 건강과 안전이 우선이기 때문에 계속 참아가며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나는 이제 가야만 했다.  당직실로. 유축을 시작하고 앞으로 10 아니 5 만이라도 누가  호출하지 않기를, 응급상황이 없기를 기도해야 했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완강했다. 나보고 아기 옆에서 아기의 엄마처럼 커튼을 치고 유축을 하라고. 나는 고민했다. 간호사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도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산모들은 아기 옆에서 유축을 해야 모유가  나오고 간호사들이 도와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지 않은 . 나는  중환자실 군함을 이끌어 가는 선장이자  여자였다. 차마 환자 옆에서  같이 일하는 의료진 옆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유축을  수는 없었다.  간호사들을 안심시켰다.  

“내 당직실에서 이 방까지는 뛰면 10초, 걸어도 30초야.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바로 전화해. 바로 유축기 빼고 옷만 쓱 내려서 빛의 속도로 뛰어 올게.”

그렇게 나는 10분의 자유시간을 얻었고 장장 20분이나 유축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우였다. 아니 기우라고 믿고 싶었다.  

24주에 태어난 아기라기엔 상태가 꽤 좋았다. 뭔가 미심쩍은 기도를 가진 아기. 하지만 큰 문제는 없는 듯 보였다. 며칠이 지나고 아기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인공호흡기를 아무리 올려도 호흡기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역시 기도가 문제였다. 기도 삽관 튜브 위치에 따라 아기의 상태는 위로 아래로 치달았다. 보다 못한 동료가 카메라가 달린 작은 줄을 내려보내 입속부터 폐 안까지 들여다볼 정도였다. 이런 시술은 아예 이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작은 24주 아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혹시나 내가 기도 삽관을 할 때 실수를 했을 까? 나도 모르게 기도를 다치게 했나?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다. 초미숙아에게는 좀 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나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 끔찍하다는 기도 파열이 일어난 걸 까? 나는 매일 아기의 차트를 확인하며 기도했다. 내가 뭔가 잘못을 해서 이 아기가 아픈 것이 아니기를. 아기가 좋아지기를.

결국 아기는 이비인후과 교수님과 협연해 같은 시술을 조금 더 숙련되고 조금 더 좋은 의료 기구로 받았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아기 기관이 선천적으로 기형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기관은 C 모양의 연골로 이루어져 있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유연하게 움직일  있도록. 하지만  아기의 연골은 O 모양으로 기관 자체가 유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엄청나게 좁은 기도였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기도 삽관했을   그렇게 기도가 작았는지,  엑스레이를 찍었을  한쪽으로 치우쳐있었는지  흡입 줄이 내려가지 않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리 병원 최고 에이스, 나의 멘토에게도  사실을 전했다. 그는 자신도 24 아기에게  기형이 있는 것은 처음 본다며 깜짝 놀랐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 산부인과 의사를 설득해야 했어, 그렇지?”

맞다. 우리는 그랬어야 했다. 조금 더 커서 나왔다면 기도가 좀 더 크게 자랐을 것이다. 기도의 좁은 구역이 덜 좁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흔치 않은 기형이 있을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몰랐다.

아기는 기도가 너무 작아 호흡기가 너무 불안정했다. 결국 우리는 아기를 우리 병원보다 더 큰 병원으로, 인공 심장과 인공 폐를 이 작은 아기에게도 연결해 기도 수술 동안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우리 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큰 병원으로 전원을 신청했다.

그렇게 아기는 비행기를 타고 많은 의료진과 함께 날아갔다. 그리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다시 날아갔다. 그 후엔 그 아기의 부모를 볼 수 없었다. 처음 분만부터 중환자실 입원 기간 동안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인사조차 제대로 못 나누고 헤어진 것이다. 아기를 위해 아기의 부모를 위해 우리는 그 산부인과 의사와 맞서 싸웠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기는 지금 살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나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간 아기와 가족. 종종 생각했다. 다른 초미숙아 아기를 볼 때마다. 작은 아기들의 입안을 들어다 보며 기도 삽관을 할 때마다. 약간 작았던 또 특별했던 기도가 생각났다. 왠지 아기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여느 날과 같이 인수인계를 하고 있는 데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내 동료는 이 아기 부모가 예전에 우리 병원에서 미숙아를 낳았는데 아기가 집에 가지 못했다고 했다. 곧바로 알아보고 내가 담당했던 환자라고 반색을 했다.

“그래서 이 아기의 상태는 어때?”  

혹시나 더 아픈 아기 일까 봐. 아니 이 아기도 집에 갈 수 없을 까 봐. 매일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던 엄마의 얼굴을 다시 볼까 봐. 갑자기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다시 같은 일은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아주 좋아.  그래도 오늘 집으로 퇴원하는 날이야.”

나는 부리나케 아기의 입원실로 향했다. 내 빠른 심박수와 보폭에 비해 천천히 복도에서 아기 카시트를 들고 나오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그 전과는 달리 이제는 코로나 팬데믹이라 모두 마스크 쓰고 있었다. 그래도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미소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엄마의 행복한 얼굴을. 엄마의 진정한 환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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