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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황 Sep 12. 2022

쌍둥이의 운명: 언니는 죽고 동생은 살다

엄마와 동생은 태어난 병원에, 언니는 아빠와 큰 병원으로 전원

전원 신청이 왔다. 미국은 보험에 따라갈 수 있는 병원이 정해져 있어서 이 병원에서 우리 병원 전원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문 것이었다. 둘 중에 하나다. 아기가 죽도록 아파서 4차 병원이 필요하던지 아니면 아기 상태가 불안정해서 그 보험 연계 3차 병원까지 전원이 힘든 경우이다. 결론은 아기가 엄청나게 아프다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이미 대충 사정을 들은 뒤였지만 아기의 상태는 정말 좋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출산한 쌍둥이   명이었는  엄마는 제왕절개를 해서 퇴원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 보는 한국어가  편한 한국인 부모였다.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캘리포니아에 살지만, 한국인 환자를 보는 것은 극히 드물다. 아마도 경제사정이 나쁘지 않고 혹여 경제사정이 나쁘더라도  정부에 보험을 신청해서 나름 건강관리를 받아서 일거라고 짐작해본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 사람만큼 병원에 쉽게 가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동네의원부터  대학 병원까지 원하면 가서 진료를 보는 것이 당연한 한국 사람들은 미국에 와서도 직장이나 주정부를 통해 보험을 가입해 필요한 치료를  받는다. 하여튼 한국말이 훨씬  편하지만 의료용어지식이 전무한 내가  한국인 부모에게 한국말로 설명하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설명했다.  쌍둥이   명의 상태는 최악이라고  만큼 좋지 않다고. 쌍둥이들은 보통 몸무게가 적게 나간다. 그런 데다가 워낙 일찍 나온 터라 몸무게가 다른 아기들에 비해 낮았다. 무슨 이유인지 아기는 바이탈이 마구마구 떨어져 있었고 거의 최대한의 치료가 침대 옆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수만큼이나 들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폐혈관의 압력이 너무 높아 산소를 공급하고 가스 교환이 되는 거의 되고 있지 않았다. 아기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전원이 망설여졌다. 혹시나 가다가 앰뷸런스 안에서 죽을 수도, 우리 병원에 가서 죽을 수도 있다. 엄마는 퇴원이 안되고  다른 쌍둥이도  병원에 있기 때문에 망설여지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최악의 죽음은 앰뷸런스 뒤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아닌 처음 만난 의료진에 둘러싸여서 끊임없는 사투를 벌이다 죽는 것이다.

물론 아기의 아빠는 우리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는 아니다. 방금 제왕절개를 끝내서 아직도 회복실에 있다는 엄마는 중환자실에 올라와 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완벽하지 않은 한국말로 아기 아빠에게 아기 상태, 앞으로의 치료의 방향, 머지않을 미래의 경과 등등을 설명했다. 한참을 무표정으로 듣던 아빠는 내게 물었다.  

“ 이 아기가 선생님 아기라면 어쩌시겠어요?”

물론 이런 질문은 매일 듣는다. 그러면 의사로서의 의견이 아니라 약간의 개인적인 선호도를 가미해 최대한 두리뭉실하게 모든 선택들을 가려서 말해준다. 이 경우는 많이 힘든 경우였다. 만약에 다른 의사가 왔더라면 어떤 대답을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성격상 쉽게 포기하지 않는 다. 그래서 말했다. 아마도 전원을 할 거라고. 하지만 아기가 앰뷸런스에서 죽을 확률 또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서 죽을 경우, 엄마를 만나지 못한다는 단점 또한 설명했다.

그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 갑시다! 한번 시도나 해봅시다!”

그가 나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며 말했을 때 나는 알아챘다. 그게 내가 원한 대답이 아니었음을. 솔직히 나는 알았다 이 미숙아는 죽을 거라는 것을. 시도야 해 볼 수 있지만, 십중팔구 아니 99% 이상의 확률로 죽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1%의 확률을 이겨내고 이 고비를 넘기더라도, 워낙 상태가 안 좋은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많은 합병증을 앓고 또 정상적인 인지활동 신체활동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포기를 모르는 나 때문에 그 1%의 확률을 내가 본의 아니게 전달했기 때문에 그 아기 아빠는 전원을 결정했다. 솔직히 말해서 다시 돌아간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저의 개인적인 선택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당신의 아이이니까요.

그렇게 전원을 마치고 아기는 좀 좋아지는 듯했다. 나는 이 4차 병원에서 일한다는 것이 또 내가 확률을 무시하고 데리고 온 아기가 상태가 좋아진 것이 조금은 자랑스러워 지기까지 했다. 생명을 구한다는 것, 내가 다른 사람은 못했다는 그것을 해낸 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측한 대로 아기는 상태가 다시 크게 안 좋아졌고 그 작은 두뇌 안에서는 출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숙아들이 뇌출혈이 자주 일어나고 경도에 따라 치료를 요하기도 아니면 알아서 좋아지기도 한다. 이 뇌출혈은 좋아질 뇌출혈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몸 전체에서 출혈과 혈액 응고가 동시에 시작되었고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아기는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넜다. 워낙 급박하게 일어난 일이라 잠깐 아내와 아기의 동생을 보러 간 아빠는 아기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죽음이 내 앞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와 동생 옆이 아닌 동정과 연민은 있지만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은 없는 의료진에 둘러싸여 아기는 죽었다. 포기를 모르는 성격, 초 긍정적인 성격, 절망 안에서도 희망을 찾는 성격, 이 모든 조각들이 퍼즐을 맞춰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다들 불가능하다는 유학생의 의대 진학을 포기를 모르는 성격으로 이뤄냈다. 힘든 의대 그리고 수련의 생활을 긍정적인 성격으로 잘 마쳤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중환자실이지만 살려내는 아기들이 더 많다는 이유로 죽음에 애써 집중하지 않으려 했다. 절망 안에서도 희망을 찾는 성격으로 힘든 중환자실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 성격이 어찌 보면 좋은 점이 더 많은 내 기질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날아왔다. 아마도 전원 하지 않았어야 할 아기가 최악의 죽음을 맞이하게 할 것이다. 황망하게 죽은 아기 앞에서 아기 아빠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나를 원망하는 듯했다. 아니면 자기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아기 엄마한테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나도 하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나야 가끔은 이 마음 아픈 사실을 잊고 살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크게 웃고 행복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 아빠는 달랐다. 잃은 아기의 얼굴을 매 순간 상기시켜주는 똑같이 생긴 얼굴, 아기의 동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전원 신청을 거부했어야 했다. 아예 가지를 말았어야 했고, 갔더라도 상태를 보고 그만두었어했다. 아기 아빠가 눈으로 파고들듯이 나를 쳐다봤어도 나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봤어도 나는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아기는 그 병원에 남아 부모와 동생이 함께 하는 그 방에서 죽었어야 했다. 나는 그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앗아갔다. 확률의 주사위를 무시한 체 내 성격대로 포기하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내 못난 객기 때문에 아기는 그렇게 혼자 쓸쓸히 고독하게 우리 병원 한 구석에서 죽었다. 가끔은 내가 죽이고 싶게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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