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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황 Feb 06. 2024

의사가 만년필을 만나면

최악의 악필도 치료제가 있네요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친구들이 거창하게 차려준 'book party' 이른바 출간 파티에서였다. 갖가지 꽃과 선물을 분에 넘치게 받았다. 그중 하나는 만년필이었다. 펜을 선물 받은 적은 졸업식 이후나 학년을 올라가면서 종종 있었다. 하지만 만년필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잉크를 직접 채우는 방식이 아니라 리필을 갈아 낄 수도 있는 옵션이 있는 편리한 만년필이었다.


"우리 작가님이 사인할 때 그냥 볼펜을 써서는 안 되지."


하며 안겨주던 친구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그녀의 금발머리 때문인지 머리 뒤로 오는 빛 때문인지 후광이 비췄다. 집에 오자마자 그 많은 선물 중 가장 먼저 푼 것은 만년필이었다. (물론 꽃다발들은 다 풀어서 꽃병에 먼저 꽂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나오는 잉크를 보고 감동도 일었다.


'대박! 이렇게 멋진 게 펜이라니!'


너무 좋아서 아껴 쓰고 싶었지만 친구는 리필도 잔뜩 넣어주는 너그러움도 장착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음껏 쓰고 있다. 그리고 알았다.


'이래서 만년필을 쓰는구나. 원래 개발새발로 쓰는데 만년필은 그럴 수가 없네. 한 글자 한 글자 공 들여 쓰게 되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 병원에서는 차트는 물론 오더까지 펜으로 썼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펜들을 내가 거쳐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얻은 건, 어차피 악필이지만 더 악필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내 글씨를 보고 다들 하는 말이 있다. (미국에서는 의사들이 글씨를 못써서 악필을 '의사 필체'라고 놀린다. 하지만 차트와 오더를 너무 많이 또 부리나케 쓰느라 그렇게 되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의사네."

"의사가 될 운명이었나봐."

"야, 글씨만 봐도 알겠다. 너 의사라는 걸."


맞다. 나는 최악의 악필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더 최악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가끔은 내가 쓴 글씨를 못 알아봐서 고민해야 할 때도 있다. 


하늘이 도왔다. 요새는 다 전자화되어있어서 전혀 글씨를 쓰지 않는다. 차트와 오더를 모두 컴퓨터로 쓴다. 펜을 쓸 때는 내가 메모할 때 그리고 서류에 사인할 때 딱 두 번이다. 그나마 서류에 사인하는 것은 시술 동의서나 수혈 동의서, 전원 동의서, 그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망신고서뿐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펜을 여러 개 가지고 다니고 한 주에 몇 번씩 다 써서 갈아치웠다면, 이제는 펜을 끝까지 다 쓸 일이 전혀 없을 정도다. (실은 병원 군데군데 놓고 다녀서 잃어버려서 끝까지 쓸 일이 없다.) 


이 만년필로 글씨를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 악필에서 벗어나게 될까. 이 만년필을 가지고 한국에 가 책 한 권 한 권에 싸인해 선물하리라. 독자에게 직접 전해 줄 일이 있다면 꿈만 같겠다. 그럼 아무도 모르리라. 내가 최악의 악필이라는 것을. 누구도 내가 의사인 것을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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