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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황 Sep 26. 2022

죽음에 가까운 아기들 그리고 가족들

고통 완화 치료 연명 치료 선택에 관하여

태어난다. 하지만 곧 죽을지도 모른다. 신생아중환자실 아기들은 이상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수십만 개의 변수를 뚫고 기적적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왜 곧 죽을지도 모르는 처연한 새싹이 되어버린 걸까. 아프고 고통스럽다. 곧 죽는다. 아니 이미 죽었어야 했다. 다만 현대 문명, 과학의 힘으로 살아있다. 이미 꺼져버린 촛불이어야 할 생명이 현대 의학이라는 가스 활로에 안착해 아직도 하늘하늘 켜져 있다. 아기는 그렇다 치자. 부모는 어떠한가. 부모는 무슨 죄로 아기의 생명줄을 계속 잡을 것인지 놓아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 이미 꺼져버렸어야 할 촛불을 억지로 켜놓은 현대 의학이 이제는 의사를 보내 묻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정하십시오.” 

내 피붙이를 내 선택으로 죽여야 하다니 어불성설이다.  행운으로 만들어진 아기가 불행을 함께 달고 나와 이제 나에게 묻는다. 나를 살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죽이시겠습니까? 어째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생긴 것인가?

현대 과학 때문이다. 축복인 줄만 알고 발전시킨 현대 의학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원래 삶과 죽음이란 신의 영역이 아닌가. 왜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가. 그리고 이제는 왜 나에게 묻는가? 내 아기를 살릴 것이냐? 아니면 죽일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다. 아직 안아보지도 못한 나의 소중한 아기를 죽일 것이냐고 묻는 것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질문인가? 저 사람은 사람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덕분에 아기를 구한 줄 알았는데, 은인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기를 죽이자고 말하는 저 사람은 의사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나는 자주 물었다. 울부짖는 부모들에게. 수없이 많은 부모들에게 삶과 죽음의 질문을 던졌다. 그들 중 몇몇은 나를 원망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얼굴을 보이기도 했다. 대부분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오직 건강한 아기의 탄생만을 준비한 부모다. 병원에 있는 아픈 아기를 바라보기조차 쉽지 않다. 어느 누가 자신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시퍼렇게 울지도 않고 축 쳐져 있을 거라고 생각할까. 새파란 새싹을 기대했는데 나온 아기는 시든 잎의 모습을 하고 있다. 출생을 죽음과 연관시키기란 쉽지 않다. 죽음과 연결되는 연령대는 대부분 노년층이다. 아기는 생명과 탄생을 의미한다. 죽음은 상상을 넘어 비현실로 다가온다.

처음 태아가 죽을 운명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일반적인 반응은 이렇게 나뉜다. 진단을 믿고 싶지 않은 불신과 현실 부정. 내가 뭔가 잘못했을 거라는 죄책감. 임신을 중단하고 싶은 생각과 그에 따른 죄의식. 앞으로는 건강한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 고통 완화과에서는 이 과정 안에서 세밀한 계획은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어떻게 아기를 낳을 것인지, 연명치료를 한다면 어디까지 할 것인지. 종교적인 도움과 의식을 할 것인지. 아기가 살아 있을 때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사진 찍기, 다른 친지들의 방문을 계획해서 도와준다. 또 아기의 사진, 심장 박동 소리, 손 발 도장 찍기를 통해 추억을 만든다. 부모와 상의해 다양한 계획을 세우면 나의 손을 떠난 아기의 운명일지라도 참여의 기쁨이 부모에게 전해진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대부분의 상담은 아기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하며 시작한다. 현재 상태가 어떠한지. 앞으로의 경과가 어떨지. 집에 갈 수 있는지. 집에 갈 수 있다면 두 번의 수술을 거쳐 목에 호흡기를 꼽고 배에 음식을 공급하는 관이 필요할지. 긴 병원생활 뒤에 아기가 뒤집고 걷고 말을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가깝고 먼 미래에 대해. 점술사도 아닌 내가 아기의 미래처럼 캄캄한 구슬을 쳐다본다. 이미 흑백으로 변해버린 부모의 얼굴을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부분들을 설명해 나간다. 약은 얼마나 쓸지, 어떤 약을 쓸지, 피검사는 계속할지, 자잘한 치료와 검사들을 계속할지 묻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선택. 인공호흡기를 제거할지, 심폐소생술을 할지, 모든 약과 제세동기 등을 이용할지, 가슴을 누르고 심장 대신 피를 펌프 할지를 묻는다.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삶과 죽음의 선택지에 체크를 해야 한다. 부모가 자식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칼로 자르듯이 “모든지 다 해주세요” 아니면 “다 그만둬주세요”로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중간쯤에서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하에서 어느 정도 치료와 검사는 약간의 희망을 주고 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가족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고 후회가 남지 않게 도울 수도 있다. 그 완벽한 적정선을 지키는 것이 그 선택을 도와주는 것이 의료진의 일이다. 의사마다 다르지만 난 대개 아기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차원에서의 치료와 생의 연장이라면 부모의 선택을 존중한다. 아기가 아프지 않다며 조금 길어진 생으로 부모와 추억을 쌓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기꺼이 허락한다.

만약에 내가 그들의 자리에 앉아있다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설문지 조사와 그 후에 추적조사에 따르면 상황 전 선택과 실제 상황에서의 선택을 많이 달랐다고 한다. 당연히 객관적인 선택지를 고르는 것과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주관적인 선택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 정상적인 사고와 객관적으로 분별이 가능하지만, 그 상황이 전해진다면 나 자신도 아마 옳지 않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나의 전문적인 소견이 아니라 엄마로서의 선택을 묻는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명백히 알고 있다. 매일 하는 작은 취향의 선택부터 크게는 의료 치료의 선택까지 주저함이 없다. 다른 의사들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부모에게 다시 질문을 돌린다. 내가 저곳에 앉아있다면 나도 똑같이 물을 것이다.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지.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해 준다. 전문의로서의 소견과 엄마로서의 선택, 둘 다를. 가끔은 두 가지가 다른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같다. 더 큰 사랑은 아기가 많이 아플 때 잘 보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약물을 투여하고 사랑과 정성으로 치료하고 돌보아도 아기는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자주 하는 피검사, 그리고 여러 치료들. 하나하나 아프지 않은 것이 없다. 말로 얼마나 아픈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마음이 쓰인다. 부모의 품에서 꼭 안겨있어야 할 신생아가 침대에 누워 줄과 관을 주렁주렁 달고 누워있다. 간혹 엄마의 냄새가 나고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뱃속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다. 그래서 돌아가야 한다. 편안한 세상으로. 부모가 아기와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최소한의 시간과 최대한의 양질로 채우고 아기는 보내줘야 한다. 더 큰 사랑은 나의 욕심과 희망을 뒤로하고 아기를 온전히 보호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고등학생일 때 잃었습니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은 얼굴로 등교한 날이 많았습니다. 길 한가운데서 학교 복도에서 아무 데서나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그때 함께 울어준 친구들과 아직도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실을 모르는 가까운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대성통곡을 하지 않고 이 말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충 화제를 돌리거나 한국에 계시다고 얼버무려 이야기합니다. 그런 밤도 많았습니다. 식물인간일지라도 아버지가 병원에서 숨이 붙어있었으면 좋겠다. 살아있기만 해도 좋겠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그런 상태로 사는 것은 삶이 아님으로. 단지 나의 마음 붙일 곳이 필요해서 내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계에 연결해 무의미한 삶을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매일 하교 길에 마을버스를 타고 성모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여고생이었던 저는 기적이 일어나 아버지가 다시 일어나실 거라고 그 버스 안에서 창 밖의 푸른 하늘을 보며 굳게 믿었습니다. 물론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저의 아버지는 가톨릭 의대에 시신을 기증하셨습니다. 아직도 제 마음의 고향에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성모병원에 누워계십니다. 실제로 살아 계시지 않아도 이미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생각이 샘솟을 때마다 아니라고 다독여줍니다. 연명치료를 개인적인 이기심 또는 희망의 일환으로 원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합니다. 제가 그중의 한 명이니까요. 하지만 그 가족들에게 또 저에게 말합니다. 더 큰 사랑은 많이 아플 때 잘 보내 주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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