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이 되는 순간들
깜박이는 아기의 눈동자, 너무 작아 부서질 것 같은 손가락, 야물게 붙어있는 귀여운 귓불. 살짝 쓰다듬으면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머릿결, 가쁘게 내쉬는 숨, 살짝 움직이는 발. 그런 작은 기억의 조각들이 그 순간들이 삶의 이유가 된다.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기로부터 갑자기 가슴 벅찬 감동이 몰아쳐와 눈을 적시고 아기만의 고유한 따뜻함이 뼛속까지 전달된다. 단순한 온기가 아닌 몽글스러우면서도 폭신한 부드러움. 오묘한 가을 노을이 주는 편안함이 주는 완벽한 따뜻함. 오로지 내 품에 폭 안긴 아기만이 줄 수 있는 그런 따끈따끈한 포근함.
아기를 가슴이 묻은 부모의 머릿속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순간들이 영화처럼 돌아가고 삶의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그게 앞으로의 한 시간, 하루, 한 달, 한 해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오롯한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순간을 선물하려고 나만의 사투를 벌여본다. ‘죽음’과 싸워 이길 수 없지만 그 순간들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을 벌여보려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의사가 되었지만 가끔은 떠나는 생명을 편안하게 도와주는 손이 되었다. 당신과 아기를 구해줄 전능한 손은 없지만 아기를 안아줄 가슴을 가진 의사가 되었다.
(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병상 위에서의 일입니다. 창밖을 바라보시다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기 봐. 꽃이 피었어.” 아버지께서 가리키신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쨍한 자줏빛의 철쭉이 드물게 피어있었습니다. 왠지 마지막 잎새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불길한 마음은 찰나, 아름다운 꽃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비록 철쭉이 지는 것은 함께 볼 수 없었지만, 그 순간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 따듯함이 아직도 가슴에 와닿습니다. 근무 중 병원 밖 창문 너머로 광활한 태평양, 아름다운 노을, 멋들어진 배, 쭉 늘어선 야자수, 시원한 분수대가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 자줏빛의 철쭉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다시 그 꽃을 볼 수 있다면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못할 일도 못 치를 값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