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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D 문화 브로셔 Jul 14. 2021

니체의 영원회귀 모순의 해결

영원회귀의 숙명성과 초인의 창조의 의지는 대립하는 것인가

니체의 위버멘쉬가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자라는 것과 영원회귀의 반복되는 운명은 역시나 모순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그것도 하나도 다름 없이 완전히 똑같이 반복되는 운명에서 어떻게 새로운 창조와 의지가 있을 수 있겠냐는 물음은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다.


영원회귀 자체가 논란도 많고, 해석도 많은만큼 이 명시적 모순에 대해서 또한 여러가지 논란과 해석들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해석은 그러한 숙명적 운명을 '내가 원한다'라고 말함으로 긍정함으로써 모순을 해결했다는 것이다.

내가 원한 것이니 나의 의지로 하는 것이지 숙명대로 따라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이 되는 논리인듯 하면서도 뭔가 찜찜하다.

물론, 들뢰즈의 해석처럼 반복되지만 차이가 발생하는 차이의 반복으로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없을까?


영원회귀란 과거에 그랬기에 지금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꾸 운명의 반복을 과거의 것이 있기에 지금의 것이 똑같이 반복된다고 사고한다.

마치 과거의 삶의 모습이 원인이고, 지금의 삶의 모습은 그것의 필연적 반복의 결과로 사고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과정에 있어서 항상 과거를 먼저 생각하고 현재를 생각하는 고정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사고 자체가 기독교의 일직선적 시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시간관에서 벗어나서 차근차근 니체가 깨달은 영원회귀의 깨닫는 과정을 되짚어보자.


니체는 순간의 문에 서서 앞으로 영원하게 뻗은 미래의 길과 뒤로 영원하게 뻗은 과거의 길을 보며 현재의 순간이 그렇게 영원하게 뻗은 길에 반드시 있었지 않겠냐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현재의 순간에 서있으면서 영원성에 대해 생각하고 영원함은 똑같은 반복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로부터 시작을 해보자.

지금 의지로 선택하고 만들어진 것에 대해

과거가 영원함으로 있으니 똑같은 것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미래도 영원히 있으니 똑같은 것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직 현재의 삶에는 결정된 것이 없다.

이제 나의 삶에서 나의 의지대로 결정될 것이다.

그렇게 삶의 모습이 결정되고 나면

과거의 무한한 삶의 모습을 뒤져보면 완전히 같은 것이 나올 것이다.

그것도 무한한 수만큼 나올 것이다.


여기서 무한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무한한  방이 있는 호텔인 무한호텔에 방이 모두 꽉차있는데, 손님 한 명이 오게 되는 경우 모든 손님에게 자기가 묵는 방번호+1번 방으로  옮기라고 한 후에 1번방에 새로온 손님을 묵게 하면 가능하다.

100명이 새로 오면 기존 손님에게 +100번 방으로 가라고 하면  된다.

무한한 손님이 오게 되면 기존 손님들에게 묵는 방번호X2의 방으로 가라고 하고, 홀수방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가면 된다.

결국 무한한 곳에는 무한함이 또 들어갈 수 있다.


지금 현재 생성되는 새로운 나의 삶의 모습은 과거 무한한 삶의 모습에 또 무한한 수만큼 새로 생겨날 수 있다.

현재의 생성이 곧 과거와 미래의 반복된 모습을 무한하게 생성해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영원회귀는 과거에 자신의 삶이 있었고, 그것을 지금 똑같이 반복하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즉 이러한 반복은 과거의 모습이  원인이고 현재의 반복된 삶이 결과라고 해석하면 안된다.

필연성에 의해서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해석해도 안된다.

니체는 그저 그렇게 과거에도 똑같은 모습이 있을 수 밖에 없고, 미래에도 똑같은 모습이 있을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영원성의 그 깊이와 무거움을 깨달은 것이다.

영원성은 무한하기에 똑같은 반복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일직선의 것이 아니라 무한히 반복되는 것으로 시작점도 끝점도 중심점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간의 고리로 되어있는 원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은 앞이 될 수도 있고 뒤가 될 수도 있다.

내 앞에 있는 것도 한 바퀴를 돌면 내 뒤가 된다.

내가 과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사실 미래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현재의 나의 행동은 똑같이 반복해야 할 과거의 그것이 없다.

지금 현재 나의 선택한 이 삶이 바로 중심점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니체의 기본 정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절대진리'는 없으며 해석만이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렇게  영원회귀를 깨달은 이후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정해진 진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깨달음에서 자신의 해석과 의미를  산출해내는 것이다.

니체의 해석과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여기서 바로 아모르 파티가 나오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고

아모르 파티가 바로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과 의미로 내놓은 것이다.

영원회귀로 인한 심연에 다다르는 절망과 니힐리즘에서 긍정을 대답으로 내놓은 것이다.

똑같이 반복되더라도 다시 그렇게 살겠노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내가 삶의 달콤한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니 다시 반복하기를 원하고

그 기쁨의 순간이 필연적으로 함께 동반해오는 고통을 긍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 순간이 영원함을 내포하는 깊은 무게가 있음을 인지하고

모든 삶의 순간에서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선택이 영원히 무한히 반복되어도 좋을만큼 나의 의지로 가득 채우겠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니체의 해석의 내용을 가지고 다시 앞으로 가서 영원회귀의 구조에 맞추면서 논리적 정합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는 방법 자체가 영원회귀에 대해 해석과 의미를 다시 산출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고 형이상학적 체계의 관점으로 영원회귀를 정리하려는 것으로 되돌리려는 퇴행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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