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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와 윌로우스비행학교

국방일보 병영칼럼 3.

by 이형걸

올해는 3·1 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시간을 그때로 거슬러 올라 가보자. 열강들의 제국주의에 편승한 일본은 우리의 국권을 뺏기 위한 계획된 수순을 밟는다. 먼저 청일, 러일 전쟁을 일으키고, 1차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1910년 한일병탄 늑약을 체결하기까지, 최대 걸림돌인 대한제국 군대를 1907년 8월에 강제 해산시킨다. 울분을 참지 못한 한 군인은 자결했고 또 다른 군인들은 일본의 총칼에 항거했다. ‘남대문 전투’이다. 살아남은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했고, 해외로 나가 무장투쟁을 펼쳤다. 군대가 해체되자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군인 양성이 절실해졌다. 대표적인 군사학교로 서간도에 이회영 애국 일가가 세운 신흥무관학교가 있고, 북로군정서가 지휘한 사관연성소가 있다. 그들은 대한제국 군대식으로 공부하고 훈련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비행사를 양성했던 군사학교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비행학교’이다.


대한제국 정령(대령)이었던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려면 무장 병력이 필요하게 되는데, 형편상 대규모 병력을 편성 유지하기가 어려우니, 소수 정예병력으로 일본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방편이 곧 항공력이라고 생각하고 비행학교를 준비한다. 당시 미국, 영국, 러시아 등 군사 강국만이 항공력을 운용하는 시기였으니 군인으로서 기개와 혜안이 놀랍다. 임시정부 이동휘 국무총리도 힘을 보탰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작은 도시 윌로우스에서 미주 대한인국민회의와 쌀농사 부호 김종림의 재정 지원을 받아 1920년 3월 한인비행사 양성소를 건립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한민국 국방장관이 이역만리 낯선 땅에 ‘비밀 공군사관학교’를 창설한 것이다. 당시 지역신문 「WILLOWS DAILY JOURNAL」은 “한국인들이 비행장을 갖다.” 제하로 한국인들이 비행 훈련을 위해 부지 40 에이커를 임대하고 교관들을 고용하여 비행장을 건설할 것이다고 했고, 젊은 한국인들이 일본과 싸우기 위해 비행사 훈련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생도 24명으로 시작했고 6월에는 30명으로 늘어났으며, 비행기는 2대를 확보했다. 그러나 그해 캘리포니아에 닥친 대홍수와 사고로 인해 재정 지원이 막히게 되자 문을 닫는 비운이 발생했다. 임시정부는 비행자격을 획득한 박희성, 이용근 2명에게 육군 참위(소위) ‘비행 장교 1호’ 임명장을 수여하며 운영에 대한 의지를 견지했지만, 날개를 접고 만다. 비행 장교와 지원 요원들은 미군 항공대나 중국 등으로 건너가 조국 광복을 위한 ‘개별적인 전쟁’을 다시 시작했고, 정신은 훗날 우리 공군에 계승되었다. 공군은 일제강점기에 항공력을 통해 광복을 꿈꿔왔던 일들을 항공 독립운동사이자 공군 태동기라 명명하고, 이를 뚜렷하고 소중하게 기록하고 있다.


공군은 창군 70주년을 맞이한 올해가 공군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 재도약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해라고 선언했다. 9·19 군사합의와 국방개혁 2.0 등 국방 핵심과제를 내실 있게 시행하고, 지난 1월 전력화한 공중급유기를 비롯하여 F-35A 스텔스 전투기, 고고도 무인정찰기의 전력화 일정은 물론 항공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주요 행사 일정도 밝혔다. 창군 70주년 공군의 비전에 항공 독립전쟁을 추진했던 항공선각자들의 열망과 소원을 담아 공군가를 힘차게 불려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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