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송죽결사대원에서 항일 비행사로

국방일보 병영칼럼 4.

by 이형걸

3·1 만세 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이듬해, 교통국장 겸 국무총리 안창호 선생과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은 한 젊은 여성을 만난다. “비행기에 폭탄을 달고 날아가서 조선총독부와 천왕궁을 폭파할 것이요.” 권기옥은 당차게 말하면서 비행사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추진하고 있던 임시정부는 1923년 이영무, 장지일, 이춘과 함께 권기옥을 중국 항공학교에 입교하도록 후원한다. 2년 후 권기옥은 윈난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졸업하고 조선 여성으로서 첫 비행사가 된다. 동아일보는 1926년 5월 21일 자에 ‘중국 창공에 조선의 붕익(鵬翼), 그중에 꽃 같은 여류 용사도 있어’ 제하로, 안창남, 권기옥 등 식민지 조선 청년이 중국 공군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방방곡곡 알렸다.

권기옥은 평양 숭의여고 학생 시절, 교사 박현숙의 권유에 따라 ‘송죽회’에 가입한다.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대나무를 의미하는 송죽회는 1913년 평양에서 조직된 여성 독립단체이다. 독립군 자금을 모집하고 망명 지사 가족을 돕는 비밀결사대다. 3·1 만세 운동 때 졸업반 권기옥도 태극기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에도 임시정부 공채를 판매하고 연락 임무를 수행하다가 투옥되어 6개월간 옥고를 당한 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임시정부를 찾아간 것이다.

펑위샹(馮玉祥) 군벌 항공대에 있던 권기옥은 1927년 국민혁명군이 공군을 창설하자 비행원으로 복무하였고, 만주를 기습 점령한 일본이 1937년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자 대일 정찰·폭격 임무를 수행하여 무공훈장을 받았다. 권기옥은 중국 공군의 임무일지라도 조국 독립운동의 지렛대로 여겼다.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겼을 때, 광복군 참모처장 최용덕을 도와 국내 진공을 위한 비행대 편성을 도모하였다. 일본의 항복으로, 천왕궁 폭격 비행을 실행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했다. 귀국 후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군 창군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6·25 전쟁 때는 전선을 오고 가며 장병들을 격려하였고, 자식이 없어 장학재단을 만들어 후학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권기옥의 남편도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이상정이며, 이상정의 동생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저항시인 이상화이다. 정부는 권기옥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2003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공군은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명명하고, 「자랑스러운 공군, 공군인」 책자에 수록하였다. 공군사관학교는 보라매 후예들의 귀감이 되도록, 박물관과 여생도 생활관에 권기옥의 기록과 대형 사진을 설치했다. 숭의여고 교정에도 유물을 전시한 작은 박물관이 있다. 평양에 있던 숭의여고가 지금은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고, 대방동은 공군본부 옛터여서 공군과 뗄 수 없는 인연이 됐다. 국권 상실기에 일제의 속박과 유교 전통의 굴레를 깨고 주도적인 삶으로 시대를 앞서갔던 수많은 여성 애국지사가 있다. 그중에 대륙의 하늘을 누비면서 조국 광복을 염원했던, 꽃 같은 ‘여군 조종사’ 권기옥 지사의 기백과 정신을 되새겨보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신흥무관학교와 윌로우스비행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