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세, 오해 그리고 마음을 지키는 법

by 학이지지

얼마 전, 한 교육을 들으러 간 적이 있다. 그날도 다른 때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굳이 나설 일도, 말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뭐 하세요?” “왜 그렇게 다니세요?” “그 나이에 아직까지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빨리 정해요.”

그 말투는 호기심보다는 평가에 가까웠다. 마치 내가 너무 오래 미정인 사람, 방향을 잡지 못한 사람처럼 들렸다. 나는 웃으며 넘겼지만, 마음 한쪽이 싸늘했다.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한 것도, 특별히 신경 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겠지만, 그 무심함 속에는 묘한 위계가 숨어 있었다. 나는 단지 배우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배움의 움직임조차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가르치는 자의 시선에서는 배우는 자의 열망이 때로는 불필요한 ‘동요’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날 이후로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말이 나를 찔렀던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 말은 한 개인의 평가라기보다, 이 사회가 배움을 대하는 태도의 축소판 같았다. ‘배우는 나이’가 정해져 있고, ‘움직여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가 정해져 있는 세계. 그 안에서 나는 늘 어긋난 존재였다.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해도, 누군가의 눈에는 불안한 사람으로 보였다. 무언가를 계속 시도하고 배우는 사람은 종종 불안의 표본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안정된 사람을 좋아하고, 움직이는 사람을 경계한다. 정착하지 않은 사람은 늘 의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 움직임 속에서만 조금씩 나 자신이 되어왔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낯선 공간에 스스로를 두며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워왔다. 그게 내 방식의 성장이고, 내가 나로 버티는 방법이었다.


그 말을 들었던 날 밤, 나는 이상하게 오래 깨어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여전히 이런 말에 흔들릴까.’ 그 사람은 나를 평가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혹독한 평가는 늘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미정인 사람이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어딘가 어색하게 서 있다.’ 그 생각들은 내가 나에게 가한 텃세였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의심하게 만드는 목소리. 결국 내가 나를 불편해하고 있었다.


살다 보면 관계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품는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함께하려는 순간에도, 질투와 불편함은 어김없이 따라온다. 그건 나의 잘못도, 상대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융은 말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보지 않으려는 그림자를 지닌다.” 우리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만, 누군가가 우리의 그림자를 건드릴 때면 마음이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쌓이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침묵으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날 그 사람이 던진 말도, 아마 자신의 그림자와 부딪힌 결과였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불안, 선택의 미정, 그런 기억들이 나의 존재를 통해 다시 떠오른 건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성찰하지 않는 평범함이 얼마나 쉽게 잔혹함으로 변하는지를. 직장, 학교,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텃세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불안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배제하며 안정을 얻으려 한다. 나는 예전엔 그런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본다. 그들도 나처럼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걸, 다만 그 두려움을 다루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걸. 이해한다고 해서 용서되는 건 아니지만, 이해하기 시작하면 마음의 무게는 조금 덜어진다.


나는 한때 ‘착하게 살면 다 괜찮을 거야’라고 믿었다. 하지만 착함은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도와주고, 웃어주고, 참아내던 순간들이 언젠가는 나를 지치게 했다. 지금은 안다. 진정한 착함은 단호함과 함께 있어야 완성된다는 것을. “지금은 도와줄 수 없어요.” “그건 제 일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 같아요.” 이 짧은 문장이 나를 지킨다. 만만하지 않게 산다는 건 거칠게 군다는 뜻이 아니라, 내 안의 경계를 분명히 아는 일이다. 그 경계 안에서야 비로소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하라는 말이 있다. 너무 가까우면 타고, 너무 멀면 얼어붙는다. 이 말이 요즘 내게 큰 위로가 된다. 나는 이제 사람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는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온도를 지키며 지낸다. 붙잡지 않으면 흘러가고, 흘려보내면 다시 돌아오는 관계. 그게 내가 배운 가장 단단한 방식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무례한 사람이 있다. 그들은 타인의 평화를 시험하고, 자신의 불안을 타인에게 던진다. 그들의 말에 반응하는 순간, 나는 그들의 무대에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이젠 굳이 해명하지 않는다. “그건 당신의 생각이에요.” 짧고 단정하게 선을 긋는다. 무례한 사람은 반응을 먹고 자란다. 그들에게 침묵은 가장 강력한 무기다.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조금만 더 참으면 괜찮아질까.” 하지만 어떤 관계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있는 일은 참고, 안 되는 일은 조용히 걸어 나오는 것. 이 단순한 결단이 나를 지켜준다. “왜 내가 떠나야 하지?”가 아니라, “왜 이 자리에 계속 머물러야 하지?” 이 질문을 던지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관계는 완벽할 수 없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데 어찌 오해와 충돌이 없을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빛을 선택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을 때 ‘이것도 내 그림자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성숙의 첫걸음이다. 누군가 나를 오해하더라도 ‘저 사람도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건 마음의 평화다.


‘나를 지킨다’는 건 벽을 세우는 일이 아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숨는 것도 아니다. 그건 스스로와 맺은 약속이다.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 지키지 못하는 약속을 또 해본다. 세상이 불친절해도, 오해가 나를 덮어도 나는 나로 남기로 했다. 쉽지는 않지만 다시 그래보기로 했다.


​여전히 세상은 좁고, 무심한 말들은 허공을 떠다닐 것이다. 그 말들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며 나를 탓한다. 머리로는 안다. 나를 지키는 것은 외부의 평가에 귀를 닫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내면의 힘이라는 것을. 누가 뭐라 하든, "그러던가 말던가"라며 어깨를 으쓱하고, "어쩌라고" 되물으며 나의 시간으로 돌아오는 것. 그렇게 나의 세계는, 타인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작은 웅덩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파도를 만드는 단단한 바다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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