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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학이지지 Jul 22. 2020

사랑니




10년전 대학병원이 아닌 치과에서 힘겹게 아랫 사랑니를 뽑았다.

할아버지 선생님이 한시간 가량 힘겹게 뽑았는데, 얼굴이 퉁퉁 부어서 말도 하기 힘들었다.


여전히 같은 치과를 다니고 있고, 얼마 전 정기검진에서 윗 사랑니를 발치해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양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충치가 될 것이 뻔했기에 급히 연차를 쓰고 발치하기로 했다. 반차를 쓸 예정이었지만 집에서 쉬어야될 것 같아 연차로 바꿨다. 막상 발치를 하고나니 반차 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도착했고 금방 내 이름이 불렸다. 아, 10년전 사랑니를 뽑았던 그 세번째 자리다.

그 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그저 입을 벌렸지만, 지금은 무서웠다

뽑는 것보다 입 벌리는 게 더 힘듦을 알기 때문이었다. 

분명 X레이에서는 금방 뽑힐 것 같이 예쁘게 있었는데 아니었나보다. 

내 입속에서 자꾸 치과 기구는 미끄러졌고, 딱딱 소리에 공포에 떨었다 . 의사도 힘들었는지 잠깐 쉬자고 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쭈구리 자세로 치과 의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냥 눈물이 났다. 펑펑 울고 싶었지만 옆에 유치를 빼는 초등학생이 있어 참았다. 


어릴 때 잘못하면 아빠가 벽보고 서있으라거나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었다. 나는 그 때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억울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알아서 의자에 앉으러 간다. 6개월에 한 번씩 치과 의자에서 지난 날을 떠올린다. 온갖 생각을 한다. 참회하고 잘못했다고 하고 한편으로 제발 치료비용이 많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빌기도 한다.

왜 거기만 앉으면, 누우면, 입을 벌리면,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이번엔 10년만에 사랑니를 뽑는 것이니, 그 의자에서 지나간 사랑들과 별짓들, 지금의 관계들에 대해 참회하고 반성하고 다짐했다.


별 생각을 다하다보니 금새 10분이 지났다. 치과의자는 다시 젖혀졌다. 미끄러지는 발치기구, 그 발치기구가 미끄러지면서 다른 이와 부딪치며 나는 딱딱소리, 따가운 입술.... 다시 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2-30분이 지났나 드디어 치아가 뽑혔다. 온 잇몸이 흔들리는 느낌. 찌걱찌걱과 딱딱 소리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내 입안에 무엇이 나왔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10년 전에는 그 사랑니를  확인했었다. 내 입속에 있었던 그 사랑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의사도 굳이 확인시켜주지 않았다. 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병원에 온지 1시간 반이 지났다. 건조한 입술에 다시 바세린을 발랐고, 얼음팩을 뺨에 갖다대었다. 시선은 자연스레 치과 천장을 보았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참담한 고독감이 느껴졌다. 자동차 바퀴에 바람이 빠진 것처럼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듯이 삐걱삐걱 걸었다. 아침에 오던 비는 그쳐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가 겨우 몸을 뉘었다.


10년 전과 달리 마취 통증은 없었다. 다만 피가 빨리 멈추지 않는다.

사랑니 발치 후 3일째 여전히 피가 난다. 건조한 입속이 피향으로 가득하다. 이번 주 내내 그러겠지.

양치를 해도 가글을 해도 금새 피가 차올라 온 입안이 피향이다. 괜히 말할 때 입을 가리게 된다.

통증없이 피만 난다. 그런데 이게 더 무섭다. 차라리 아프고 힘들면 뭐라도 했을텐데 소리가 없으니 무덤덤하다.

그렇게 10년 전 사랑니에게는 두드려맞고 얻어터지고 울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폭풍전야처럼 잔잔할까.


20대의 열정적이고 궁금증 가득한 사랑이 가끔은 그리워진다. 나를 좋아했던사람, 내 매력이 무엇이라고 말해주던 사람이 생각 난다. 서로의 관계보다는 매력에 끌려 미쳐하고 아파했던 시간. 

하지만 지금은 그 매력보다 상대방의 안온한 일상을 더 빌게 되고 책임감이 곧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의 매력도 어느 순간 단점으로 변하게 되는 걸 알기에....

그러다보니 그의 두드러진 매력보다 그와 나 사이의 평범하고 공기 같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 오히려 나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더 끌리게 된다.

때문에 이제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그가 아닌 그와 나의 관계다. 오직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그 관계의 독창성을 살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말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10년치의 생각들이 얽히고 설켜 머릿속에서 경련이 일어난다. 불꽃이 튀고 의식이 흐려진다.

또다시 불안하고 무섭다. 마치 누군가에게 말살 당하듯이....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다시 읽어야겠다. 20대 때 읽고 미쳐서 별 지랄을 다하게 했던 책. 

첫 사랑니를 뽑았을 때 자취방에서 혼자 고통에 몸부림쳤던 것처럼.....

20대 때 기다리게 하는 것이 정말 큰 권력이라는 것도 알았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하고 그 사람의 시간을 나로 채우려고.... 

이제는 밀당 없이 상대방에게 기다림보단 편안함을 주고 싶은 마음만 커져간다.

이제는 억지로 기다리게 하지 않아도 너무 상대방을 기다리게 하게 하니, 미안함만 커질 뿐.

지금은 조용히 내 할 일하고 빨래를 돌리고 집을 사기 위해 재테크에 관심을 가진다. 생활의 방식을 함께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

당신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감추는 것이 보여져야 한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것도 제발 알아달라고 빌어야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너만 알아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너만 알아야 한다는 사실만을 누군가는 알아야 하고. ... 


사랑니도 뽑았겠다. 내 사랑의 정의도 변했겠다.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으면 나는 그저 한동안은 멈추지 않는 피향을 입안 가득 머금은 채 씁쓸한 마음만 들려나. 








이제 마지막 사랑니가 남았다. 이 다음이 어떨지 나는 어떤 생각에 사로잡힐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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