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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넉참이 neokcham Dec 14. 2024

부동산 30군데를 돌며 깨달은 것

서울에서 집 구하기

집을 보러 다니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처음에는 어떤 부동산을 가야 할지 막막해서 '피터팬의 좋은방 구하기' 앱에서 괜찮아 보이는 집을 골라 해당 부동산에 연락했다. 부동산에 내가 원하는 조건들을 이야기하고 바로 약속을 잡았다.


� 조건
- 입주일 : 11월 이후
- 지역 : 강남 혹은 판교로 30분 이내(2/7/9호선 라인)
- 금액 : 전세 혹은 반전세로 최대 2억 원
          (대출이자+관리비+월세 등을 합쳐 한달에 50까지 지출 가능)
- 매물 조건 
  1. HUG 버팀목 대출(+보증보험) 가능한 매물 선호
  2. 투룸 혹은 큰 1.5룸
  3. 반지하, 1층 X 화장실 컨디션 좋아야 함
  4. 도보로 지하철 10분 이내 거리
  5. 풀옵션(*냉장고 크기 커야 함)이거나 세입자가 쓰던 것 양도 가능한 곳
  6. 높은 언덕 X, 평지 선호
  7. 기타 : 주차 필요없음, 반려동물 없음


처음 부동산에 방문한 날, 중개보조인이 찾아둔 매물 리스트에서 내가 원하는 컨디션의 매물을 고르는 데 2시간 정도가 걸렸다. 보통 다른 부동산에서는 중개사가 미리 매물을 찾아두고 그 매물을 바로 보러 가는 방식이었는데, 여기는 조금 특이하게 내 조건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매물을 선별했다. 그리고는 지금 선별한 매물 중에는 HUG 버팀목이 가능한 매물은 없으니, HF 버팀목 대출이 가능한 매물로 보여주겠다고 했다.


부동산 투어를 시작한 첫날이기도 하고, 서울 매물의 시세와 집 컨디션이 궁금해서 HUG 버팀목 대출이 안되는 집이라도 일단은 보러 가겠다고 했다. 중개보조인이 찾아둔 수십 개의 매물 중 5개를 골라 보러 다녔는데, 모든 집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빌라였다. 모든 집들이 너무 좁고, 더러웠다. HF 버팀목 대출 매물에다가 보증보험도 안 되는 집들만 보러 다녔는데, 이 정도 퀄리티라니 정말 한숨만 나왔다. 내가 제시한 조건에 맞지 않는 집도 많았다.


부동산 투어 중 만난 고냥이


집에서 밥을 많이 해 먹기 때문에 냉장고는 꼭 큰 집으로 가고 싶었는데, 조그마한 냉장고가 있는 집을 보여준다거나, 가파른 언덕 끝에 있어 비나 눈이 오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집도 있었다. 이런 건물에 있는 집들은 세면대와 샤워실이 분리되지 않아 샤워 후 변기가 흠뻑 젖는 구조였다. 아무래도 내가 제시한 조건을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서도,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은 양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수정한 조건
- 입주일 : 12월 이후
- 지역 : 강남 혹은 판교로 1시간 이내(2/7/9호선 라인)
- 금액 : 전세 혹은 반전세로 최대 2억 5천만 원
          (대출이자+관리비+월세 등을 합쳐 한달에 70까지 지출 가능)
- 매물 조건 
  1. HUG 버팀목 대출(+보증보험) 가능한 매물 선호
  2. 투룸 혹은 큰 1.5룸
  3. 반지하, 1층 X 화장실 컨디션 좋아야 함
  4. 도보로 지하철 15분 이내 거리
  5. 풀옵션(*냉장고 크기 커야 함)이거나 세입자가 쓰던 것 양도 가능한 곳
  6. 높은 언덕 X, 평지 선호
  7. 3층 이상이라면 엘리베이터 필수
  8. 기타 : 주차 필요없음, 반려동물 없음


일단 전체적인 시세를 확인했으니 자금을 조금 더 늘려 2억 5천만 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월 지출 가능한 금액도 70만 원으로 올렸다. 당장 이사를 가야하는 것도 아니어서 입주 가능일도 미뤘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을 때까지 계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부동산에서는 얼른 계약을 성사하려고 무조건 HUG 대출이 아니어도 괜찮고, 융자가 있더라도 안전한 범위라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보증보험이 불가능한 HF 대출을 받으라고 설득했다.


처음엔 정말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내 주변에 전세 사기를 당한 사람도 있고, 유튜브에 '버팀목', '전세 대출' 같은 키워드만 입력해봐도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영상이 넘쳐났다. 이 부동산이 내가 사기를 당했을 때 책임을 질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안전하지 않은 집들을 소개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무조건 HUG 버팀목 대출이 되는 집만 보여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중개보조인은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집을 보여주는 태도가 눈에 띄게 소극적으로 변했다.


처음엔 매우 친절했던 중개보조인이라 꼭 이 사람을 통해 거래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부동산도 알아보니 소개받는 매물의 퀄리티가 훨씬 나아졌다. 요즘 부동산들은 여러 부동산이 함께 공유하는 매물 사이트를 이용해, 본인의 지역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매물을 중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어떤 부동산은 이 사이트에서만 검색해서 매물을 찾는 반면, 어떤 부동산은 특정 부동산만 가진 독점 매물이 많은 곳도 있었다. 여러 부동산을 비교해보니 매물 퀄리티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이래서 집을 찾을 때는 부동산을 한 군데만 가지 말고 여러 군데를 다녀야 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주변 지인의 소개를 받아 부동산을 찾아가기도 하고, 직접 검색해서 찾아보기도 하고, '오즈의 집' 같은 사이트에 문의를 올려보기도 했다. 원하는 매물을 찾기 위해 이렇게 발품을 팔다 보니, 어느덧 한 달 반이 지나 있었다. 그 사이 30곳이 넘는 부동산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워낙 많은 부동산과 이야기하다 보니, 점점 어디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부동산이 HUG 대출이 가능한 집은 없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나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전세 사기 같은 일에 휘말려서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는 싫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안전한 집, 그리고 내 마음에 쏙 드는 집을 찾고 싶었다. 현실에 타협해서 집을 계약했다가 사는 내내 불평을 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드는 집이 나타나지 않아서, 이 정도면 차라리 이사를 포기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때, 운명처럼 한 부동산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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