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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 Feb 02. 2020

인도가 내게 준 삶의 교훈 (1)

부제 : 기름통 해탈




인도는 많은 이들에게 미지의 세계이자 범접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곳이라 할만하다. 인도 여행을 했다고 하면 하나 같이 묻는 말들이 '거기 위험하지 않아?', '음식은 잘 맞아?'라는 말들로 돌아오니 말이다. 하지만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실제로 인도는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세계 어느 곳과도 같지 않은 독특한 나라임엔 틀림없다. 덥고, 냄새나고, 시끄럽고, 더러운. 인간이 불쾌함을 느끼는 최악의 조건들이 종합 선물 세트로 제공되는 인도지만, 인도에 한번 다녀온 사람은 그 독특하고도 형용할 수 없는 매력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한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뜻하지 않은 순간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삶이 송두리 째 바뀌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나의 경우 대학생 때 혼자서 떠난 인도 여행 속에서 그 선물 같은 순간을 얻게 되었는데, 그 교훈은 그 이후 나의 삶의 많은 기준을 바꾸어 놓았다. 


오늘은 내가 또다시 인도를 찾아갈 수 있게 해 주었던 몇 가지의 삶의 교훈 중 나 스스로 '기름통 해탈'이라 명명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때는 2014년 2월, 군 입대를 앞두고 수많은 송별회에 파묻혀 유난 떨다 입대하는 게 싫어 나는 입대 전 한 달간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두 번째 와보는 인도였지만 여전히 더럽고, 시끄럽고, 냄새나는 뒷골목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나는 푸쉬카르라는 호수 도시에서 조드푸르라는 도시로 이동을 했어야 했다. 인도 여행자들은 보통 여행자 전용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어찌하다 보니 나는 인도 현지인들이 타는 50루피(약 900원) 짜리 버스를 타고 새벽녘부터 약 8시간을 이동하게 되었다. 


인도 현지 Local 버스 (8시간 이동에 약 900원이면 충분하다)


나는 이 버스를 시점에서 종점까지 쭉 타고 갔어야 했기에 운전기사 바로 뒤 상대적으로 레그룸(?)이 넓은 창가 쪽 자리를 먼저 꿰차서 앉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타더니 이내 버스는 곧 출발했고, 나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어 부족한 잠을 청했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떠보니 버스는 인도 현지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인도 현지 사람들만 타는 버스였기에 모두들 처음 보는 외국인이 잠에서 깨어나 허둥대는 모습이 재밌었는지 깔깔대며 웃어댔다. 


인도 시골 도로 풍경과 사람들로 가득찬 버스


그러던 중 그 일이 일어났다. 

버스에 타는 사람들이 들고 타는 짐을 둘 곳이 없어 상대적으로 공간이 남았던 내 자리 앞쪽에 짐을 걸터 놓곤 했는데, 어떤 아저씨가 기름통 2개를 양손 가득 들고 타더니 내 자리 앞쪽에 턱 하니 걸쳐두고 나 몰라라 한 체 자기 자리를 찾아 가버린 것이다. 그냥 기름통을 바닥에 둔 것이었으면 별 생각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저씨는 기름통을 '타이어 위에 간당간당'하게 걸쳐놓았고 이 것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버스, 조금씩 움직이는 타이어. 그 위에 걸쳐 놓아 진 기름통 2개

평소 나는 매사에 걱정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 아저씨가 저 기름통을 내 앞에 두고 무심히 자리로 가는 그 1초의 짧은 찰나에 내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타이어가 계속 흔들리는데, 저 기름통이 쏟아지면 어쩌지?
기름통이 쏟아지면 내가 다칠 수도 있겠는데..
심하게 다쳐서 내 여행도 망쳐버리면 어쩌나..
 내가 다치면 군입대에도 차질이 생길까?


너무 빠른 찰나에 스쳐 지나간 다양한 생각(이라고 쓰고 걱정이라고 읽는다)이 순간 내 머릿속을 지배했고, 생각을 곱씹다 보니 갑자기 이 원흉을 만든 저 무심한 아저씨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저씨가 자리 잡은 앞자리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웬걸, 그 아저씨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속 편히 창밖의 풍경을 음미하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저 아저씨는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을 알까?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저 아저씨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내가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왜 위험한 기름통을 사람이 다칠 수도 있는 이 자리에 두었는지 일어나 따지고 싶기도 한 것 같다. 그렇게 무심히 버스는 갈 길을 갔고 속 편한 그 아저씨도, 속 불편한 나 자신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체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생각이 내 머릿속을 불현듯 스쳤다. 


저 아저씨가 내릴 때까지, 기름통이 쏟아지지 않으면 어쩌지?

만약 저 아저씨가 목적지에 도착해 버스가 내릴 때까지 이 기름통이 쏟아지지 않으면 저 아저씨는 평생 내가 이런 고민을 한 것을 모를 것이다. 알 길이 없겠지. 짧은 찰나였지만 저 아저씨의 행동으로 인해 나는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그것을 평생 저 아저씨는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약간은 짜증이 나고 내심 저 기름통이 그냥 쏟아져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속으로 씩씩 대고 있길 몇 분, 또 다른 생각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어.. 어쩌면 저거 기름통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자세히 그 기름통이 흔들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기름 같이 묵직한 액체가 들어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이 통이 기름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약간은 허무하기도 하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했던가 멋쩍어 졌다. 하긴, 돌이켜보면 누가 내게 저 통이 기름통이라도 이야기한 적도 없었고, 나 스스로 그 통을 기름통이라 명명하며 그것이 내게 위협이 될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던 와중, 무심하게 창밖만 쳐다보던 아저씨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자리로 다가왔다..!


기름이 들었다기엔 너무 가벼웠던 통. 어쩌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을지도.

아저씨는 내 자리로 다가와 경쾌하게 두 기름통, 아니 두 통을 들고 유유히 버스를 내렸다. 아저씨가 통을 들고나가는 모습을 보니 기름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기엔 통은 너무 가볍고 경쾌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그 통에 들어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앞으로 다시는 못 볼 그 아저씨는 '나'라는 사람이 이런 생각과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평생 알 일 없이 무심히 그 자리를 떠났다. 기름통이 아니어 보이는 두 통과 함께.




아저씨가 자리를 떠난 뒤 내 머릿속은 또다시 복잡해졌다. 짧은 찰나에 나는 그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기름통도 아닌 통을 기름통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쏟아질 걸 걱정했으며, 그 생각에 혼자 스트레스를 받고 누군가를 미워하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생쇼를 했던 것이다. 하하하. 그래도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를 것이라며 웃어넘기려 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짐을 느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갖고 있던 두려움의 본질은
결국 내가 만들어 낸 허상과 망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그때 당시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 스스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Black Box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겐 걱정이었고 고민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 모든 걱정과 두려움은 세상 그 누구도 내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 내 머릿속에 만든 허상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기름통이 쏟아질까 걱정했던 나 자신처럼. 


삶 속에서 마주하는 많은 걱정과 고민들도,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허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이 일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불안정하면 어떡할지? 그 사람이 나를 안 좋아하면 어떡하지? 인생을 살면서 던지는 그 수많은 만약(What If)들은 어쩌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나 스스로 가정하고 상상하면서 스스로를 더 억압하고 옥죄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두 통을 들고 유유히 사라졌던 그 아저씨처럼, 대부분 우리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들은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날 수 없을 일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 나는 삶을 살아가며 고민과 걱정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뇌곤 한다. 이 것은 기름통이 아니라고. 설령 그것이 기름통이었다 할지라도, 쏟아지지 않는다고. 설령 기름통이 쏟아졌다 할지라도, 잘 닦고 가던 길을 가면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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