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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학거사 Nov 23. 2021

Justice & No Mercy

TV 채널을 이리저리 틀다가, “노아”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았으며, 언제 제작되었는지? 감상평은 어떠한지? 등에 대한 일절의 정보 없이 시청하였으며, 다양한 C/G를 활용하고 스케일이 어마 무시한 방주세트 등은 제작에 심혈을 기우렸음을 느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어제 밤의 시청이 아침까지 계속 여운으로 남아.. 자료를 찾아보니, 다양한 입장에서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저에게 강하게 전하여져 오는 메시지는 작품 곳곳에서 표출하고자 함에 따르는 절대자의 “공의”와 “자비”가 아닌가?를 생각해 봅니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하며 네피림이 어떻고, 100% 성경적 이야기는 아니며 해석상의 오류가 있니 마니.. 등 의견이 분분하지만, 노아에 관한 역사는 창세기 4장 분량으로 그 자체를 해석하거나, 그 시대상에 관한 충분한 고증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 제작은 너무나도 힘든 작업이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시각에서 풀어헤침은 창의적 입장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은 자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 위한 자세와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지니는 휴머니티를 어떻게 극복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고뇌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으므로, 노아 가족 모두도 죽음으로 심판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노아의 절대 기준에 가족들까지도 등을 돌리는 상황이 연출됨에 따르는 갈등속의 주인공은 믿는 자 모두를 대표하는 것 같았습니다. 절대자께서 행하신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심판을 “전 인류의 멸망”으로 해석하며, 가족의 희생까지도 불사하는 노아와 그에 반발하며 그를 거부하는 자신의 가족들과의 대립이 잘 연출되어 인간의 자유의지와 종교적 믿음과 복종에 대한 각자의 성찰을 유도하는 메시지라 생각됩니다. 클라이맥스로 절정을 이르는 장면은 첫째 아들이 낳은 쌍둥이 손녀에게 칼을 들이대며, 고민하는 대목으로 결국은 칼을 접고 창조주의 뜻을 거역했다고 자책하며 가족을 떠나 매일 매일을 술로 버티며 살아가게 됩니다. 창조주의 뜻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지키고 싶었던 아담의 후손 노아, 그가 푯대로 향한 그 길에 가족과 함께 하지 못 하드라도 그 자체는 자신의 숙명이라 생각하며 행하는 인간과 신, 믿음에 대한 근원적인 그 자세는 요즘의 세상에서는 상상도 찾아볼 수도 없음에 안타깝기까지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하늘의 자비와 은총을 느꼈으므로, 노아는 자신의 쌍둥이 손녀들에게 축복해 줌은“나의 창조물들을 세상에서 없애려 한다.”는 신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 이후 인간을 세상에 남기느냐 마느냐의 선택권을 쥔 인물로서의 갈등과 고뇌에 따르는 해피엔딩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갈구하지만, 먼저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하는 부분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로 하나님의 공의의 관계를 가장 잘 정의한 말씀은 로마서(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은 당연한 공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쉽게 풀어보면, 우리 모두는 누구든지 이 공의(公義)에 의하여 주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으로 죄를 짓게 되면 죽음이요, 회개하고 믿어 의롭다 여김을 받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으로 회개하고 믿어 의롭다 여김을 받으려함에 따르는 과정(환난과 연단을 통과)에 깊이를 더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온전히 찾으려 한다면, 의롭다 여김을 받으려함에 따른 과정 속에서 “자비와 은총”이 따른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 할 것 다하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자비와 은총”을 구함은 말도 안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더 나아가 대충대충, 가끔 가끔으로 믿음을 존속하며 오래 참아 주실 것이고, 내가 찾아 가는 순간 자신을 잘 알아봐 주실 것이라는 착각과 망상은 빨리 내려놓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입니다. 교회 봉사와 열심이므로 자신을 안 알아봐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하는 마음을 먹는다면, 그 또한 No Mercy(용서는 없다)로 스스로 양심학상으로 풀어보아도 답 나옴에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면, 바로 그 자체에 대한 문제인식에 심사숙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깨닫게 될 것이고, 그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 그의 나라와 뜻을 이루게 될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임으로 항상 흔들림 없는 믿음과 회개에 열심을 내서 구원을 현재 시제(시점)로 소유하고 살아가며 현대판 선악과를 취하면 절대 아니 될 것입니다. 행위대로 갚으시며 행함을 따라 선악간에 판단하시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그에 대한 변별을 신뢰하여야하며, 우리의 삶에 NO Mercy에 합당한 악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도록 삼가 행함에 따르는 자비와 은총의 샘물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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