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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학거사 Nov 23. 2021

믿음의 역설

몽골 초원지대의 광활한 땅위에 천 마리 이상의 가축을 기르는 목동들의 이야기로는 일 년에 야생 늑대나 맹수로부터 10마리 이상이 희생된다는 것을 다큐멘터리에서 보게 되는데, 그렇다면 공중 권세 잡은 우는 사자와 같다는 사탄마귀는 일 년에 얼마나 많은 조심성 없고 어리버리한 믿는 자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몽골 초원지대의 늑대나 맹수는 자신들의 배를 채워 춥고 험난한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한 애절한 몸부림이지만,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서 공중(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인간을 미혹하는 능력과 권세를 행사하기 위하여 어떤 행태를 보일 것인지? 를 미흡하나 다양한 측면에서 추측해보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무엇인가? 에 몰입이나 중독되게 유도하므로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든가? 두려움이나, 강력한 힘에 굴복하게 만들어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버리든지, 잘 나가는 형국에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버리고, 제대로 가는 방향을 조금씩 틀어 아주 다른 곳으로 당도토록 하며, 세상이 감당치 못하게 너무 잘 나가 손을 못 대면 참소하거나 공박하며 흠집 내기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창조역사의 “이기는 자”라는 결과의 관계성은 “영원한 불 못으로” 와 “영생을 누리는 천국 삶”의 전환으로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고, 새 창조 역사도 생명이 존재할 경우에만 참예할 수 있는 선택권을 지니지만, 현생의 임시적 생의 갈림길을 결정짓는 요소인 죽음으로 자신의 지내온 삶 자체에 대한 평가를 갖게 됩니다. 자신이 영위한 지내온 삶의 궤적에 관한 평가를 위한 변별은 절대자께서 제시하며 약속하신 사실을 믿어 신실하게 지켰는가? 와 그 자체를 불순종하며 배도함으로 일관되었는가? 에 대한 절대적 지표에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믿고 아는 것 많지만, 영원한 생명에 접붙임 되지 못한 자되어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마 7:23)라 하시는 “믿음의 모순과 역설(패러독스)”에 대하여 깊이 상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간에 자신은 지옥과 같은 세상에 세상의 권세자로부터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줄서 있으며, 그 자체를 숭배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함에는 성령의 외침이 아닌, 교회와 종교생활의 판에 박은 듯이 사용되는 상투구 혹은 진부하며 달콤한 표현들에 마취되어 최종 승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냉혹한 영적전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과 영원함”이라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긴장 그 자체는 생명으로 새 창조를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요인으로, 이러한 역설(패러독스)를 인식함으로써 우리 믿는 자 모두는 무한광대하며 무소부재한 창조의 세계를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새 창조의 기반은 “죽음과 영원함”으로 양면이 분리된 것 같은 생각을 지니게 하지만, 사실 양면처럼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수렴되며. 이처럼 상반되고 모순됨은 우리 인간들이 구획을 나누어 이해하기 쉽게 편의상 만들어낸 의미일 뿐으로 창조된 세계와 새 창조로 이루어질 세계에서는 그런 구분 자체가 없고 오직 낙원의 영생만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말씀 자체를 주심에 진정으로 감사해야 됨에는 활자로 쓰여진 글자는 절대자께서 생각하신 것들로 무지 몽해한 인간들을 사랑하시어 성령의 감동으로 그 수준에 맞는 눈높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 몇 줄 안다고, 가는 곳마다 주구줄창 써먹기보다는 창세기 첫줄의 “천지를 창조하시며 운행하시고, 있으라 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심은 글 자체가 있기 전의 하나님의 시점을 의식을 지닌 인간들에게 생각하는 구분을 이해하기 쉽도록 해주신 것을 인식하며 그에 다가가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창조”에 따르는 현상과 사건에 언어라는 도구(모형)을 통하여 의미와 개념을 부여하고 이해하는 것일 뿐으로, 실제적 자신의 영은 빛나는 형체로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지만, 무한한 제한이 열려.. 진리 자체를 명확히 꿰뚫어낼 수 있음으로 인간 스스로 쌓은 것들을 믿고 따름에 어리석음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의 새 창조역사는 자신에게 부여해 주신 자유의지 기반에 Yes or No로 스스로 취사선택함을 통한 또 하나의 진전이나 퇴보를 경험케 되므로, 자신의 선택이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앎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강력해지는 영적인 힘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어렵게 말로 꼰 자체를 쉽게 풀어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한 뜻”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소유에 누가? 손을 댈 것인가?라고 하는 말에 솔깃하고 자만하며 안주해서는 절대 아니된다는 것으로.. 이는 활자와 의미 자체로는 맞는 것이지만, 그 자체는 인간들이 전체에서 부분을 풀어 헤쳐 축조된 전체로 성령의 조명으로 받아 풀어내지 않는다면, 자기조직화 기반의 받아내지 못함에 따라 바벨탑을 쌓아감에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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