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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학거사 Nov 23. 2021

형식에 치우치는 숭배..

이 세상에서의 가장 큰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정하는 것으로 이러한 지혜는 일견 세상 속에서의 처세술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 질 수 있으나, 그것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에 합당한 세상적 삶을 영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상적인 삶까지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만 함에 있어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기지 말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뢰하여야 하며, 삶의 모든 순간에서 조차 지속적인 태도와 행동으로 나타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허울 좋은 썰은 그만 피우고, 자신과는 전혀 다르신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인식한다면, 전적인 의뢰와 의지 밖에는 답 없음을 빨리 눈치 까고 철저하게 맡기고 의지하며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로 인한 상당한 갭이 존재함에 따라 무조건적인 순종이 제사보다 낮다(삼상 15:22) 하시며, 주어진 상황과 어떠한 현실에서도 자족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는 말씀 자체가 생명력 있는 생기로 심령과 육이 살아가며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생수의 원천으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인간으로써 생(삶)을 영위하는데 필수/필요적 요소인, 인간으로써의 처신의 원리와 법칙, 신조를 바탕으로 구원을 향한 방향과 목표로 나아감에 피조물이 반드시 적용하여야 하며, 꼭 거쳐야 될 과정의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내용들을 심플하게 문제해결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스스로 옳다 여기거나 잘난 척하지 말고, 무조건적 순복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며 경외하는 것이 절대적인 키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에 있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구원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려 하심이 포괄적이며 최종적인 결말이라면, 인간들에게 있어서 새 창조의 역사는 인간(영)들 안에서 역사가 이루어지는 영‧혼‧육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가설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만물이 존재하는 이 세상의 삶에서 각자는 이동성전으로의 역할을 부여받아 이기는 삶을 이루어내는 과정을 통하여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며 영존하는 영원한 안식에 거함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가설과 유추를 통하여 결과로 얻어낼 수 있는 전제는 단순하고 성실한 자세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통하여 믿고 따름의 중심 심지가 견고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이같이 굳은 심지를 통하여 푯대를 향하여 한발 한발 내딛으며 나아가다보면, 하나님께 근접할수록 자신의 마음과 행동은 점차적으로 순결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자신의 인생과 삶의 가치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인식에 따라 더욱 더 의미 있는 성령의 살아 역동적인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으로,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실재와 실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에 따라 악에서 떠나려는 결심과 용기는 자연발생적으로 샘솟고, 환난과 연단을 통한 험난함과 혼란 속에서도 의연히 다가갈 수 있는 담대함이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잡신들에게 존재하는 야릇한 공포와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는 숭배가 아니고,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기듯 말이 필요 없는.. 내 안에 거하여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하심과 같은 단지 그 안에 거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족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영의 실체인 인간이 완전함이 무한하시고 지극히 순결한 영이시며 사람의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 신뢰를 지닌다면, 그 대상에 대한 성품과 그 실질(영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에센스(성품·스피릿·영·영혼))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진정한 순복만이 필요하므로, 예식만을 따르는 형식적인 태도로 찬양과 경배를 드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다양한 본분에 관한 경우가지수가 있지만, 참으로 부족한 부분은 의미 있는 인생을 넘어 절대자를 향한 경외함을 이루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떤 것이라야 진정한 믿음으로.. 어떻게 해야 경배가 상달되는지에 관한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고 했는데.. 믿음이 막연한 상태에서도 스스로의 진실한 순복과 순종으로 진실한 경외에 이룰 수 있으며, 말씀이 쌓여가며 피동적(남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에서 점차 주동적으로 변화되어 나아가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익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군소리 뺀 단도직입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피조물인 믿는 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류와 교제이지 구원에 관한 보증수표격의 맹목적인 따름과 형식에 치우치는 숭배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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