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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학거사 Feb 28. 2024

생명을 담보로 하는...

얼마 전 지인이 카톡으로 아리랑에 관한 색다른 소식을 전해주어 간직하고 있다 글을 쓰며 생각이 나서 나누어보고자 하며, 아리랑은 한민족의 대표적인 민요라 하지만, 민요보다 잡가나 타령으로 전승되다가 1920년대 들어 이광수 등 일본 유학파가 민요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민요로 정착되었으나, 노동요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인이 보내 준 아리랑에 관한 내용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曲) 1위에 선정되었다고 하는 소식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작곡가들로 구성된 "세계 최우수곡 선정대회"에서 82%라는 높은 지지율로 단연 1위에 등극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선정단에는 단 한 명의 한국인도 없어 더욱 놀라게 했으므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의 아리랑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기존에 들어보지 못한 아리랑에 관한 해석을 ”아리랑의 참뜻은 알고나 계시는가?" 하며 제시하는데, 근거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그럴싸해 나누어보고자 하는데, 사실 제대로 모르고 있었고, 만일 외국인이 물어보더라도 그 뜻과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다양한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작가 미상의 아리랑하면, 흔히 사랑에 버림받은 어느 한 맺힌 여인의 슬픔을 표현한 민요나 일노래(노동요) 정도로 대충 그리 알고 생각하는데 아리랑 민요 속에는 큰 뜻이 담겨 있는데, 원래의 참뜻은, <참 나를 깨달아 > 인간 완성에 이르는 기쁨을 노래한 <깨달음의 노래> 라고 합니다. "아"(我)는 참된 나(眞我)를 의미하며, "리"(理)는 알다, 다스리다, 통한다는 뜻이고, "랑"(朗)은 즐겁다, 다스리다 란 뜻이므로 아리랑은 “참된 나(眞我)를 찾는 즐거움” 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더불어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것은 자신(참 나)을 찾기 위해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이고, "고개를 넘어 간다"는 것은 <피안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뜻이랍니다. 또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진리를 외면하는 자는 얼마 못가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으로, 진리를 외면하고 오욕락(五慾樂)을 쫓아 생활하는 자는 그 과보(果報)로 얼마 후 고통에 빠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아리랑의 이치와 도리를 알고 나면 아리랑은 “한의 노래”나 일노래와 같은 저급한 노래가 아님은 물론으로 전 세계가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작품임이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의 칼빈대학교 교수이며 미국 찬송가편찬원이었던 버트 폴먼은 아리랑 멜로디로 1990년 미국 찬송가 229장을 만들었으며, 캐나다 찬송가에는 실제로 아리랑의 멜로디가 채택되어 공식 찬송가로 애창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아리랑은 우리의 민요, 아니~ 이제 전 세계인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으므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증거임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내용을 전해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리랑이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 내음이 물씬 풍긴다기보다는 그 자체의 근본이 종교적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더불어 일본작가 나쓰메 소세키 “행인(行人)”이란 소설 속에 “이치로”라는 주인공이 말하는 자신의 앞에는 “죽거나, 미치거나, 아니면 종교에 입문하거나 세 가지 길 밖에 없네” 라는 말은 종교라는 것이 마치 노후를 보장하는 연금이나, 노후 그 너머 사후를 보장하는 보험은 절대 아니라 합니다. 더 더욱 살고 싶은 대로 다 살고서 말년에 덤으로 품는 것이 종교가 아니라, 이성과 지성의 물성이 가장 예민하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젊은 시절에 택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는 것으로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 그 자체를 담보로 하는 매우 고독한 선택이라는 일본작가 나쓰메의 사견에 저는 동감합니다.

천로역정의 의미나, 제가 경험한 믿어가는 과정은 자신들의 전 삶이 종교가 되어야 한다.. 를 넘어서는 종교 자체는 생명을 사이에 둔 교만과 겸손의 샛길(사이길) 쟁탈전이라 표현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교만과 겸손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므로 사잇길이라 하면, “샛길”의 본말로 더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역할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길을 잘못 들면 미로에 갇히거나, 사이에 난 길로 새거나 빠질 수 있음에 교만과 겸손의 경계나 의미를 잘 정리해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잠언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라는 말씀은 너무 잘 아실 것이며, 남을 높이어 귀하게 대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겸손”이라 한다면, 자신의 교만과 위선으로 절대자 위에 아무것도 없어야 함에도.. 때론 자신을 높여 “옥상 옥”을 만드는 것을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 자체를 찬양과 경배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깨닫고 진실된 삶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추구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냥 할 것 다하고, 전통적이며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할 일을 다했다라고 하는 위선적 안도감, 떳떳함을 가져보려는 그러한 관념은 바로 거짓된 의, 곧 자기 의를 추구하는 행태가 됨에 벗어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거짓된 자기 의에 빠져서 형식적 신앙 및 교회생활, 율법주의적 활동에 올인하는 세상의 일반적인 삶의 행태와 그릇된 종교적 관념은 믿음의 장성한 분량만큼의 성장에 있어서는 절대 아니 되는 독소들로 그것들을 떨쳐내기 위한 회개를 게을리 하고, 위선과 외식, 자기 의라는 악의 길에 빠져 올바른 하나님 나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다른 예수를 믿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입니다. 일반 세상의 눈으로 보면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닐 수 있는 것들.. 남보다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재물, 더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통하여 그 자체가 교회에 다니는 존재의 의미이며, 자신의 삶의 가치라 생각한다면, 차라리 교회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막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것들을 가장 혐오(?)스런 악한 행태라고 질책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점검하고, 생각을 돌이켜 생명을 담보로 하는... 믿음생활이 절대적인 종교생활이 될 수 있으므로 교회 직분으로 오래 믿어.. 우리 교회 은혜 많이 받으므로 등과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살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참은 그 스스로가 근본적인 교만의 근거와 원인으로 작용될 수 있기 때문에라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에 따라 발생하는 미국의 유명한 유튜버에게 벌어진 일을 통하여 “교만한 자들의 최후”라는 제목의 실제적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저는 미국 프로레슬링 WWE 광팬이므로 잘 알고 자주 TV에서 보는 유튜버 스타이며, 권투선수이자 젊은 프로레슬러인 로건 폴(Logan Paul)의 이야기입니다. 로건 폴이 유튜브 채널에 나와 앵커와 대담을 나누며, 앵커는 “한 유명 유튜버가 하나님을 모욕한 후 어떻게 됐을까요?”라고 멘트 날리자, 로건 폴이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넘어가는데, 로건 폴은 “우리에겐 치료사가 필요하지.. 예수는 별로 하는 게 없어요. 난 도무지 이해가 안가요.. 왜? 우리는 이렇게 어리석은 믿음을 지속시키려 하는 거죠? 제가 솔직히 말할게요. 예수 그리스도는 엿이나 먹으라고 해요..”라고 짓거립니다. 몇 주 후... 휑한 모습으로 나타난 로건 폴은 “저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모욕했는데, 그 후 3주 동안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카타르에서부터 고난이 시작 됐어요.. 식중독으로 죽었다 살아났고, 공항에서는 카메라를 빼앗겼으며, 호텔에서도 이런저런 사건이 많았고, 갑자기 일이 터지며 스케줄이 펑크 나고, 술독에 아파 누웠으며, 공항에서 저희 짐이 안 나오고 등등 저는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를 제 인생 처음으로 느꼈어요.”라고 고백함에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함을 폄하하다 죽을 똥을 싸보고 이제는 하나님 살아계심을 제대로 알고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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