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에서 믿는 자들이 θ의 경륜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그분의 계획이 단순히 지적 설명이 아니라 실존적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θ의 경륜은 머리로 푸는 수학이 아니라, 삶으로 걸어 들어가는 믿음의 길이다. θ은 “하셨고”, “그래서 하셨고”, “되어가게 하시며”, “이루실” θ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믿는 자들을 통해 세상 속에서 그분의 경륜을 이루어가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가?”를 묻기보다, “그 이루어짐에 내가 지금 어떻게 동참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θ이 세상을 다스리고 구속을 완성해 가시는 그 거대한 계획 — 곧 θ의 경륜— 은 믿는 자들에게도 때로는 세상 속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적 충돌을 가져온다. “하셨고, 그래서 하셨고, 되어가고 있고, 이루실 것이다”라는 구속사의 시선으로 볼 때, 우리는 이미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세상 속을 살아가며, θ의 경륜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중간의 시간(Already–Not Yet)”에 서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여정은 단순히 한순간의 결단이 아니라, θ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지는 “되어감”의 과정이다. 성경은 θ이 “하셨고, 그래서 하셨고, 되어가고 있으며, 이루실 것이다”라는 흐름 속에서 인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단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구속의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시는 θ의 지속적 일하심을 보여주는 언어다.
그러나 이 신앙의 언어는 현실 속을 살아가는 믿는 자들에게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긴장을 낳는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존재이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틈에서 믿는 자들은 신앙과 현실의 간극을 경험한다. 이 긴장은 θ의 다스리심과 세상의 불의를 동시에 바라보게 만든다. “θ이 다스리신다”는 고백과 “세상은 여전히 악하다”는 현실 사이의 모순은 믿는 자로 하여금 “정말 θ이 일하고 계신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러나 이 괴리는 θ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점진적 역사 방식의 증거다. θ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완성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드러내신다. 요셉의 감옥, 욥의 고난, 다윗의 도피, 바울의 투옥은 모두 θ의 경륜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인간의 눈에는 지연처럼 보이지만, θ의 시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믿음은 바로 이 과정을 신뢰하는 일이다. “θ은 멈추지 않으신다. 단지 아직 다 보여주시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되어감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주 자신을 향해 실망한다. 변화되지 않는 습관, 반복되는 실패, 연약함과 죄의 유혹은 마치 성화가 멀게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θ은 완벽한 자를 찾지 않으신다. 오히려 연약함을 통해 의존을 배우게 하신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이 고백은 성화의 본질을 드러낸다. 성화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θ께 더 깊이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되어감의 과정은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통해 θ의 자비를 배우는 훈련장이며, 그 속에서 θ의 경륜이 구체적으로 구현된다. 한 사람의 되어감이 다른 이의 회복과 연결되고, 공동체의 연약함 속에서 θ의 자비가 드러난다. 결국 성화는 개인의 독주가 아니라, θ의 백성 전체가 함께 맞춰 가는 하모니다. 믿는 자들이 또 한 가지 부딪히는 어려움은 세상의 시간과 θ의 시간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은 빠름과 효율, 경쟁을 숭배한다. 그러나 θ의 경륜은 느림과 기다림, 그리고 십자가의 역설을 통해 완성된다. 세상은 즉각적인 결과를 원하지만, θ은 카이로스 — 곧 θ의 때 — 안에서 일하신다. 인간의 눈에는 늦은 듯 보이지만, θ의 시간은 언제나 정확하다. “때가 차매 θ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라는 말씀처럼, θ의 계획은 언제나 완벽한 시점에 맞춰 이루어진다. 믿음은 바로 이 θ의 시계에 내 시간을 맞추는 일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역설의 신앙을 배운다. 낮아짐이 높아짐으로, 약함이 강함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변하는 θ의 방식은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는 더 깊은 질서가 숨어 있다. θ의 질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차원에서 흐르고 있으며, 바로 그 역설 속에 진리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지쳐간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들었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고 세상은 오히려 악해지는 듯 보인다.
이 기다림의 지연은 신앙의 열정을 식게 만들고, 약속의 성취에 대한 냉소를 낳는다. 하지만 종말은 단순히 기다림의 사건이 아니라, 참여의 현실이다. θ은 우리를 단순한 구경꾼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그분의 완성에 동참하는 동역자로 부르신다. 매일의 순종, 사랑, 정의의 실천 속에서 우리는 θ의 나라를 ‘미리 살아내는 존재’가 된다. 예배 또한 그 미리 살아냄의 자리다. 예배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완성을 현재로 불러오는 시간이며, θ의 미래가 지금 여기에서 열리는 순간이다. 예배 속에서 우리는 θ의 경륜이 이미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경험한다. 결국 신앙은 이해의 영역보다 참여의 영역이다. θ의 경륜은 머리로 푸는 신학적 수학이 아니라, 삶으로 걸어 들어가는 실존의 길이다. θ은 하셨고, 그래서 하셨고, 되어가게 하시며, 결국 이루실 θ이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믿는 자들을 통해 그 경륜을 세상 속에서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이루어짐에 내가 지금 어떻게 동참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믿음이란 θ의 설명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경륜 속에 자신을 맡기며 살아내는 용기이다. 이해보다 신뢰가 앞서고, 설명보다 순종이 앞서는 삶. 그것이 바로 θ의 경륜 속을 살아가는 “되어감의 신앙”이며, 세상 속에서 하늘의 뜻을 이루어가는 믿는 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