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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학거사 Nov 22. 2021

믿음의 뻘짓 후폭풍

한동안 정말 많이 고민을 했던 부분은 저를 포함하는 믿는 자들의 “뻘짓”에 관한 대목으로 오래 믿었고 아는 것이 많다면 성숙되고 장성되어야함이 당연할진데, 어느 영역은 넘어가지도 못하고 스스로 한계를 지어버리고 옳다고 굳건히 믿어버린 것들을 강퍅하게 주창해대며 변해보려는 노력은 일점도 찾아 볼 수 없음에 대한 것들입니다. 믿음 속의 자유함과 평강을 위하여서라도 수용하라는 것이 아닌, 넘길 것은 넘기고 포용할 것은 거져 받았으니 수용적 차원에서 자유함을 견지하여야 될 것임에도 부드러움과 여유는 둘째 치고 경직에 가까운 차가움으로 일관함에 대한 반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짧은 한 세상 살아가며 무엇이 그토록 옭아매어 벗어 못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직의 정도는 경화를 넘어 거의 콘크리트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믿음의 뻘짓에 따르는 후폭풍에 관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적으로 각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행태를 “뻘짓”이라 한다면, 스스로의 역량에 따라 넘길 수 있는 것을 수용해 나가는 차원의 “계층적 구조”와 더불어 계층 구조에 있어서의 역할에서 나올 수 있는 “역기능적”인 상황에 대하여 깊이 있는 분석을 해 보아야만 될 것 같습니다.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 나가야만 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들의 뻘짓은 무너져가는 자유의지의 보상이라 자책하기에는 그에 따르는 후폭풍과 희생은 너무나 크지만, 스스로 자아의지를 기반으로 절대자에게 온전히 매달리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뻘짓은 지속적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바보 같은 쓸데없는 짓인 뻘줌의 줄임말인 뻘짓거리는 믿는 자 모두 무지몽매함과 불완전함을 넘어, 찬양과 경배에 관한 스스로의 서투름이나 무능을 깨달을 만큼의 경험이나 상황 혹은 지식이 아닌, 계층적 구조에서의 잘못된 자리매김에 따르는 역기능으로 발생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뻘짓”은 영어로 “wild goose chase”로 표현되므로, 야생 거위들이 어딘가 방향이 있는 것처럼 마구 달려가지만 정작 쫓아가다 보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에서 착안된 관용구로 왜? 하필 갯벌인 뻘이라 했을까? 와 어쩌다 갯벌은 인간에게 비하 폄훼되는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지니게 됩니다. “뻘”은 바닷가 갯벌의 갯바닥이나 늪의 바닥에 있는 진흙을 의미하는데, “뻘”에서 구덩이를 파면 조금 후에 바로 구멍이 메워져 버리므로 파고 또 파도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에 “짓”의 ‘행위’를 붙여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삶으로 영위해 나가야만 하는 믿음에 관한 다양성 속의 통일성으로 다름을 인정하여야 한다기보다는 스스로 쌓아 올린 인식과 가치관적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형식들이 과감 없이 부서져야함을 믿음의 행위에서는 “내려놓음”이라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그 “내려놓음”의 인식적 차원에서 인간의 헛발질 격인 뻘짓을 스스럼없이 자행하면서도 그 자체를 모르거나. 아님 어설프게 인식하므로 인하여 안다하면서도 허방을 저질러버리는 경우는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삶의 논리 가운데 최상위에는 절대자의 창조역사가 계층을 이루어 존재함을 깨달아 그에 대한 찬양과 경배의 영역을 세분화하여 그에 관한 관계적 입장을 고수하고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에도 자신을 계층구조의 상단에 존재케 하므로 혼선을 이루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중심을 계층 상단에 위치하게 함에 따라 믿음의 질서를 이루는 계층적 심도를 이루어낼 수 없으며, 절대자와 동급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그 계층적인 위치적 심도를 조정하거나 맞추어낼 수 있는 믿음의 계층 구조적 프로토콜의 연동성과 융통성은 발휘될 수 없음을 알아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계층적 심도는 각 레벨별로 계층에 따르는 절대적인 역할과 기능이 있음에 분활된 모듈들이 서로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유기적으로 동작하여야 하는데, 계층 구조적 모순으로 그에 대한 에러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절차를 따르지만, 그 자체가 뻘짓거리가 될 수밖에는 없음을 전제적으로 깔고 인식하여야함에도 계층 구조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림에 따라 찬양과 경배에 관한 계층적 군집화를 이루지 못함으로 다른 루틴으로 밖에는 돌아갈 수 없는 한계를 지님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한계에 따르는 믿음의 뻘짓으로 따라오는 후폭풍은 찬양과 경배에 대한 상황을 스스로의 입장과 환경에 맞게 설정된 인지유형에 따라 규정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로 발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서적인 문제로 발현된다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거나, 옳다고 여김에 따라 결과적으로 부정적 왜곡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 왜곡 초래는 본질적인 믿음에 필요한 기본적 전제초자도 부정해버리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속에는 굳건히 굳어버린 역기능적 신념과 가정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스스로가 아닌, 세상을 창조하신 절대자에게 있음에 따라.. 교회에서의 봉사와 직분, 입신, 천국과 지옥 경험,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많이 알고, 방언과 예언, 통변과 함께 환상을 보고, 치유와 축사 사역 등의 능력을 얻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닌, 본인의 관계적 입장을 잘 정리하는 것이 옳바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절대자께서 하시는 일은 절대자의 마음이라 함에 대한 관점을 제대로 생각을 할 수만 있다면, 보여주고 싶으면 보여주고, 은사주고 싶으시면 주시는 것으로.. 믿는 자들이 잘못 접근하는 근본적 입장에서 스스로의 임의적 추론에서 출발하는 오류를 정정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찬양과 경배에 따르는 말씀을 통한 결정적 증거가 있음에도 그에 못 미치거나, 그와는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시킴에는 선택적인 취함에 따르는 스스로 좋은 것과 편함에 초점을 맞춘 결과가 아닐까?를 생각해봅니다. 이 모두는 스스로 쌓아 올린 믿음의 열정적 과잉으로 초래될 수 있는 것들로 세상의 결과보다는 본인의 중심을 보시는 절대자께서 인정할 것이라는 서로 상반된 결론들이 상호 관련이 없는 상황으로 적용됨에 따라 이에 대한 심오한 각성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상반된 찬양과 경배에 대한 의미 확대와 축소는 믿음의 올바름에 관한 그 깊이를 크게 왜곡하는 것으로 형식에 치우치며, 관습적인 방향이 잘못된 지도 모르고 따라 행하며 스스로 만족해하며 그 안에 함몰해 버리게 됩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부분을 스스로 축소하였음에도 아니라~ 자위하며, 자신과 다른 것들은 못마땅해 하며 틀린 것이라 자체적으로 해석해버리며 안위하는 것은 극단적 사고의 발로임도 알아채지 못하고 오류를 지속시켜 나갑니다. 이는 찬양과 경배의 방식과 절차에 대한 중요성을 흑백 논리의 중심 가운데에 놓고, 다름에 따른 스스로 좋은 것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들만의 패턴으로 구체화시키고 일반화해버리므로 올바른 값을 얻어내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되는 것으로 스스로 정리해버리며 그에 순응하고 현실적인 지각을 무장해제 해버리므로 바른 것들에 대해 과소평가는 당연히 하게 됩니다. 긍정적일 것 같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그에 대한 중요성과 관련성은 쏙 빼돌려 버리고, 그 상황들에 익숙해지므로 다르면 부정적이라 해석해 버리고 간극을 벌여버리므로 돌아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줄 끊어진 연이 되어버림에 경각심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본질적인 올바름이 있음에도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하여 초래됨을 모르며, 스스로들이 쌓은 가정들안에 갇혀있는 자신을 발견치 못하고, 편파적인 스스로의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애쓰지 말고 무릎 꿇어 죄송하므로 살려달라고 외치는 편이 빠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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