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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학거사 Nov 23. 2021

스리서리 동동

어렸을 때는 누님들이 빨간 아주꽈리 꽃 열매로 꽈리를 분다고 했었는데, 요즘은 보기 드문 꽃으로 아주까리는 소박한 우리 민족의 서정이 담긴 민요 강원도 아리랑 가사에 등장합니다. 아리아리 동동 쓰리쓰리 동동이 함께 나오는데, 봉산탈춤에는 새님과 서방님이 파자 놀이(漢字(한자)의 字劃(자획)을 分合(분합)하여 글자를 맞추는 수수께끼, 즉 원래 表意文字(표의문자, 뜻글자)인 漢字(한자)의 짜임을 풀이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내는 것)를 한답시고, 아주까리를 들먹이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이는 돈으로 벼슬을 산 무식한 양반층을 풍자하는 대목에 사용됩니다. 게으른 농부는 잔머리 쓰다가 농사를 망치고, 마음씨 착한 혹부리영감은 도깨비 덕택에 혹을 떼고, 마음씨 나쁜 혹부리영감은 도깨비 때문에 혹을 더 붙이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듯이 믿음을 존속시킨다고 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우며 사실 신경 쓰이는 사안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세상적 문제는 해결하라고 있는 것으로 두려움으로 찌그러져 타협하거나 분위기에 휩싸여 두름으로 무조건적인 수용보다는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문제의 중심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수만 있다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과 조건을 발견하거나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문제에 짖눌려 손발 묶고 앉아 있다 라면 아무런 진전이나 더 나아짐은 없을 것으로 항시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위인들과 세상의 혁신가들은 현재보다는 미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줄 아는 용기 있는 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으로 물론 문제를 해결하다가 욕심으로 인하여 혹 붙인 혹부리 영감 설화처럼 되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으로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하늘의 기준에 따른 의사결정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서리서리(뱀 따위가 몸을 똬리처럼 둥그렇게 감고 있는 모양으로 감정 따위가 매우 복잡하게 얽힌) 또는 스리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 듯 해서는 아니 되지만, 문제 자체를 아예 포기하거나, 순수를 기반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야 그렇다고 손칠 수 있겠지만, 어설프게 알면서 자신이 아는 것이 다로 우기거나 설쳐댄다면 답 없는 게임으로 바로 접거나 노선을 변경하는 것이 바름직 할 수도 있을 것인데.. 특히 믿음이라는 측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스리스리 서리서리 동동”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에 관한 본질적 문제는 사람이 정한 인본적 기준으로 새로운 우상을 때를 따라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값 없는 총체적 기준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관용을 신봉하면서 세상에 나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자가 당착해 버립니다. 이 같은 작은 허수적 헛놀림의 시작은 미약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근본적인 본질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려 놓으므로 인하여.. 어디에서부터 왜?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를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아주 미묘하며 조심스러운 부분으로 누구나 아니라아니라 절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하겠지만, 저 자신 용기 있게 외치는 바로.. 스스로 절대자와 하나님께서 인 치신 그리스도의 종인 목사를 동급으로 생각하는 부분을 가슴에 손을 얹고 발견하게 된다면, 그 자체의 보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봅니다. 아니면, 절대자를 경외함에 있어서 그에 대한 인식이 낮거나, 제대로 된 신령과 진정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스스로 깊이 존경하고 자신의 마음을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함에 뭔가? 뭔지? 모를 누룩이 석여 있을 수도 있을 수 있으므로 자신을 내려놓고 무의식적이라도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주님 다시 오실 때는 죄가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인간들이 도덕적 기준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함에는 선과 악을 구별 및 분별할 수 없는 하와로 인한 불순종의 결과가 현실적 확증으로 확연해짐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시간대의 마지막 됨의 예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 중심 기준이 흔들림으로 인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분별력은 희미해지고, 메시아를 경홀히 여기는 때가 된 것이라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구원에 이르도록 용서하실 것으로 절대로 심판을 통해 벌하지 않으실 것이라 여기며, 안위해서는 아니 되고, 더불어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자신을 벌하시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조심에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 세상이 아닌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생각에서 스리서리 동동함에서 벗어나, 자신을 영원히 머무를 곳에 보내실 그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하나님 무서운 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그 속의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 올려드리는 데서 비롯된 경건하며 진솔함의 발로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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