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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Sep 03. 2019

‘모든 직장인은 퇴사한다.’는 명제에 대한 고찰

서울의 3년 이상 퇴사자들의 가게들 :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읽고


  직장인 14년 차. 오늘도 점심 먹고 회사 인사 시스템에 접속해 퇴직금 예상 금액을 조회해본다. 어제와 같은 금액을 들여다보며, 남아있는 대출금을 헤아려본다. 더하기 빼기 해보니 여전히 (-). 심기일전하여 오후 업무에 돌입한다. 그렇다. 회사는 나의 성실에 노동에 대한 대가로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을 통장에 입금해준다. 육아휴직 동안 가장 아쉬웠던 것은 월급이었다. 월급은 금전적 가치 외에 내가 사회의 일원이라는 증명서로의 기능도 한다. 그러나 회사가 나의 깨달음에 감복하여 ‘어이쿠 감사합니다. 원한다면 언제까지라도 출근해주십시오~’ 할리 만무하다. 한 해, 두 해 조직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게 남은 기간은 짧아진다. 지금 환하게 타오르는 양초도 언젠가는 닳아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혹시 내가 넋을 잃고 월급에 취해 있는 사이 내 양초는 다 타버린 거면 어쩌지? 맙소사. 


   현미경을 들이대고 찾아보자면 삶에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무난하게 살아왔다. 착한 어린이였고, 우등생에 속하는 모범생이었다. 무난히 대학에 입학했다. 남들 다 하는 공무원 시험 몇 년 준비하다 보기 좋게 낙방하고, 졸업하는 해에 지금 다니는 회사에 취업했다. 그 해 내가 문을 두드렸던 회사는 광고회사, 증권회사, 건설회사, 중장비 회사, IT 회사, 은행 등등. 눈치챘겠지만 아무런 맥락이 없다. 심지어 지금 다니는 IT 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가장 먼저 합격자 발표가 났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나는 경제학을 전공했다.) 예민한 척했지만, 순응적인 인간이었고, 세상은 그런 나에게 따뜻한 편이었다. 회사의 업무는 적당히 성실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정도였고, 매달 입금되는 월급, 선배들의 칭찬, 이름을 들으면 아는 대기업 계열사 직원이라는 정체성은 나의 소박한 인정 욕구를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간간히 이직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론은 늘 같았다. 어차피 조직생활은 똑같으니 굳이 이직을 왜? 어차피 조직에서 성공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다. (조직에서 성공은 역시 임원..) 막연하게 나중에 뭐 해 먹고살지?라는 고민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먼 미래의 일 같았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외면의 유통기한이 끝났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만화 <원피스>의 루피처럼 고무고무 열매를 먹기라도 했더라면 좀 달랐을까? 


   <원피스>의 루피는 고무고무 나무 열매를 먹고 나서, 고무처럼 늘어나고 줄어드는 탄성을 가지게 된다. 이런 능력 덕분에 외부의 타격에 대한 대미지를 줄일 수 있다. 고무고무 나무 열매를 먹은 직장인은 어떤 사람일까? 회사의 언어로 ‘조직의 비전과 나의 성장을 일치시킨다. 그리하여 나의 역량 향상과 조직의 성과가 Align 되도록 하고… 블라블라’ 정도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1년짜리 KPI를 하달받고, 본인도 확인할 수 없는 과제를 아래에 들이밀며 닦달하는 상무님. 전무님. 그리고…. 사장님이 전형적인 고무고무 나무 열매 먹은 직장인의 모델이다. 그들의 통장에는 나보다 몇십 배, 몇 백배의 돈이 꽂힌다. 나도 그 열매를 먹어볼까?

  완전 반대편에는 “월급루팡”이 자리 잡고 있다. 회사에서 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는 직원을 말한다. 매력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다. 진정한 월급루팡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월급루팡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몰라야 한다. 모든 직장인은 ‘나 정도면 괜찮은 성과를 낸다’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있다. 그래야 아침에 자괴감 없이 회사에 출근할 수 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 귀인이다. 세상 모든 문제는 “남 탓”이다. 타고난 능력자만이 가능한 선택이다.

 사실 내가 고무고무 나무 열매를 먹을 것이냐 혹은 월급루팡이 될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것도 아니다. 고무고무 나무 열매를 먹는다고 내가 ‘월급쟁이의 별’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월급루팡으로 살기엔 낯짝이 만두피처럼 얇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조직을 박차고 나와 나의 살 길을 찾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이는 제4차 산업혁명으로 필요한 노동력은 줄어드는데,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삶은 길어지는 시대에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이냐는 고민과 맞닿은 문제기도 하다. 아이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되고 싶은 꿈이랄까? 직장인의 미래가 ‘별’ ‘월급루팡’ 외에 또 뭐가 있을까?...... 남은 건 퇴사. 퇴사를(결심 아니고) 생각하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조언을 받고 싶었지만, 주위에 그 흔한 프리랜서도 사업하는 사람도 없다. 다들 직장인이거나 혹은 백수. 아무리 유유상종이라지만, 이토록 빈약한 인간관계라니. 퇴사사들의 책, 블로그, 인터뷰 등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이 책. “서울의 3년 이하 퇴사자들의 가게들 : 하고 싶은 일을 해서 행복하냐 묻는다면? 을 만나게 되었다. 


  주문하고 한참을 책장에 꽂아 두었다. “퇴사해서 가게 차렸더니 꿈을 이뤄서 너무 행복해요~”라는 이야기라면 배가 아플 것 같았고, “나오지 마세요.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에요.”라는 이야기라면 절망적일 것 같았다. 비닐도 뜯지 않은 책을 방치해 두다, 유난히 다음 날 출근이 싫던 밤, 아이를 재우고,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비닐을 뜯어 한 장씩 넘겼다. 퇴사하고 가게를 차린 3년이 채 되지 않은 초짜 사장님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다음 날 동틀 때까지 쭉 읽었다. 


인터뷰어(작가 : 조퇴계)는 집요했고, 인터뷰이(사장님)들은 성실했다. 내가 만약에 어떤 업종이든 가게를 처음 시작한다면, 그들의 인터뷰를 참고로 체크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인터뷰는 구체적이다. 회사를 퇴사할 때까지의 마음의 변화 혹은 마음고생. 결심하게 된 계기들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무릎을 쳤다. 현실적인 이야기들보다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할 때 더 오래 눈길이 머물고 몇 번을 곱씹어 다시 읽었다. 인터뷰 내용들이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 느껴지는 경우도 많았다.  


- Q) 최대한 버티지 않고 굳이 자의로 관둘 이유가 뭔가?  A) …. 노력과는 무관한 부정적인 결과가 빤히 내다보이는데 무슨 동기를 가지고 최대한 버티겠나? 내가 왜 여기서 노력해야 하는지 동기를 찾기 어려웠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이른 시점에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편이 장기적으로 최선이라 생각했다. P.267
- Q) 다른 회사로 이직할 생각은 없었나?  A) 이직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회사 안에서나 쓰임이 있지, 밖에서 통용될 만한 능력을 키우지 못한 것 같다. …. 연차가 10년 차나 되는데도 내세울 기술이 없더라. P.271
- Q) 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가 뭘까? A)….. 반면 오늘날 일이란 내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 것 같다. 회사가 그를 위한 기반으로써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퇴사를 고민하게 되는 거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P.349

  다음 날 대학 친구들 단체 카톡방에 책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다. 며칠 후 “책을 사두었더니 남편이 읽고 사표를 냈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물론 이 책을 읽고 즉흥적으로 사표를 낸 것은 아니다. 내년쯤 생각했던 퇴사를 몇 달 앞당긴 것이지만 그 결정에는 이 책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많은 직장인들의 꿈은 사실 “로또 당첨 후 퇴사” 다. 그러나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바로 퇴사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매일 아침에 눈을 떠서 내가 갈 곳이 있고 할 일이 있다는 루틴이 삶에 선물하는 안정감은 매달 찍히는 월급 금액과는 무관하게 의미가 있으니까.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이렇다. 지금부터 퇴사를 준비하자” 내일 당장 사표를 내지 않더라도, 3년 후 혹은 5년 후 무엇을 하며 살지에 대한 고민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도, 다른 직장인은 모두 그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같이 대책 없는 사람 제외하고. 물론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은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라고 말한다. 구글 미래학자 커즈와일은 엄청 두꺼운 책까지 써가며 2046년에 특이점이 와서 인공지능이 인간과 동일한 능력을 가지게 될거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무계획인 기택의 계획이 가장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퇴사준비는 ‘마라샹궈 음식점을 내느냐 베트남 쌀 국숫집을 내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돈을 받고 팔아도 부끄럽지 않은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재능이 있는지. 그리고 그 일을 할 때 행복한지를 미리 점검해보는 것이다. 이 책의 많은 사장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직장인이다. 

모든 직장인은 퇴사한다. 

고로, 나도 퇴사한다.


시기의 차이일 뿐 ‘퇴사’는 정해진 수순이다. 설령 그것이 정년퇴직일지라도. 


퇴사 준비의 첫 단계로 나이 오랜 짝사랑, 책과 함께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을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샀다.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 책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과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 솔직히 책이 정말 팔릴 거라고 생각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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