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네오페이퍼 Sep 18. 2019

바니타스 바니타툼 (헛되고 헛되니)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 기차표 예매 전쟁이 시작된다. 공항버스를 타려면 미리 앱으로 자리를 예약해야 한다. 스마트폰이 일반화되고 세상은 변했다.  세상은 편리해졌다.  합계로 보면 제로섬이 아닌 플러스지만, 마이너스를 손에 쥔 개인들이 있다. 앱 사용 방법을 몰라 기차표 예매 전쟁에 참여조차 못하고 역에서 한참을 기다려 겨우 기차에 오르는 노인들처럼 말이다. 



  명시적으로 소설 속에 드러나지 않지만 시댁적 배경은 대략 1940년~1970년대의 체코슬로바키아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에 1960년대 초반 스탈린을 추종하는 정권에 반발하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1968년 개혁파가 정권을 잡으며  공산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으로 민주 자유화 노선을 선택하게 된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다. 그러나 그해 8월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를 앞세워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개혁파를 추종한 50여만 명의 당원은 제명 혹은 숙청당했다. 그런 시절을 살고 있는 폐지압축공 '한탸'의 이야기가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한탸는 지하 작업실에서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압축기로 매일매일 쏟아지는 폐지를 압축한다. 그에게 압축해야 할 폐지라며 도착하는 것들은 없어져 마땅한 나치 문학이나 히틀러 찬양 책, 혹은 관련 핌플렛 같은 것도 있지만, <도덕경>, <파우스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이 값을 매길 수 없는 장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책들은 도살장의 피 묻은 종이와 같이 취급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꾸러미들은 킬로그램당 1 코루나에 팔린다. 책에 가까이 있고 싶어 선택한 직업이지만,  삼십오 년째 절망적인 일만 하고 있을 뿐이다.


 "밀려드는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책의 등짝이 빛을 뿜어낼 때도 있다. 공장 지대를 흐르는 혼탁한 강물 속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물고기 같달까. 나는 부신 눈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그 책을 건져 앞치마로 닦는다. 그런 다음 책을 펼쳐 글의 향기를 들이마신 뒤 첫 문장에 시선을 박고 호메로스 풍의 예언을 읽듯 문장을 읽는다. (중략) 나를 위한 미사인 독서의식을 행하고, 내가 만든 꾸러미 안에 그렇게 읽은 책을 올려놓는다. 각각의 꾸러미를 아름답게 꾸며 하나하나에 나의 개성을 부여하고 내 서명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꾸러미들이 저마다 뚜렷이 구분되게 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다. (중략)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파우스트>나 < 돈 카롤르스> 같은 책이 활짝 펼쳐진 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뿐이다."(p.14~p15) 


   절망 속에서 그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시대는 모르지만 나는 그 책의 가치를 알고 있다는 자부심. 나만의 방식으로 숨겨진 가치를 지킨다는 소명의식이 있다. 책을 읽으며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의 한 복판에 가닿"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날마다 가방 속에 책을 챙겨 와 집에 쌓아둔다. 집에는 그가 구해낸 2만 톤의 책들이 있다. 잠잘 곳도 부족해 소파에 쪼그려 앉아 밤을 보내지만 힘들지 않다. 

"그날 찾아낸 수많은 책들, 내 가방 속에 든 책들 생각에 골몰해 길을 걷는다. (중략)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중략) 작업을 하면서 어쩌다 읽게 된 책들, 그 안에 든 사고의 기름으로 내가 날마다 영원한 야등을 밝히는 책들을 이제 집으로 가져간다." (p.16~p.17) 

   그에게도 꿈이 있다.  5년 후 은퇴할 때 회사로부터 압축기를 사는 것이다. 그리곤 집에 있는 책 중에서 골라 하루에 한 꾸러미만 만든다. "긴긴 명상을 거쳐 완성한 부끄럽지 않은 꾸러미"를 만들 그 날을 꿈꾸며 현재의 고통을 감내한다.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인생이 끝나기 전 언젠가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9년을 살고 있는 나도 한탸처럼 직장인이다. 쏟아지는 폐지들을 처리하기 위해 압축기를 돌리며 끊임없이 일을 하는 한탸 처럼, 그 날의 to do list 를 하나씩 처리한다. 한탸가 각각의 꾸러미에 하나의 개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나도 내가 하는 일이 가급적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처리되도록 노력한다.  나도 내 일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래 봤자 한탸의 꾸러미가 킬로그램당 1 코루나 가치로 밖에 평가되지 않는 것처럼, 나의 일도 내 정성과 상관없이 회사의 기준으로 평가될 뿐이지만.. 대신 퇴근하고 아이가 잠들고 나면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나중에 퇴사 후 (내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준비다. 한탸가 은퇴 후, 하루에 한 꾸러미만 정성스럽게 만들겠다는 목표로 책을 모으고 절망을 견디는 것처럼. 이 정도면 내 삶은 한탸와 거의 데칼코마니 수준 아닌가?  과연 한탸는 5년 후, 그의 바람대로 살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이야기 중간에 나오는 외삼촌의 이야기가 한탸의 끝을 예고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외삼촌은 40년 동안 철도원으로 일하며 건널목 차단기를 올리거나 내리며 선로 변경을 하는 일을 했다. 일이 유일한 기쁨이었던 그는 은퇴 후, 폐쇄된 역에서 낡은 선로 변경 장치를 사들여 자기 집 정원에 설치했다. 고철더미에서 소형 기관차를 찾아 정원에 선로를 만들고 기관차를 운행해, 선로 변경 작업을 계속했다. 평생토록 애정을 쏟았던 일로 노후를 즐기던 삼촌은 뇌졸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돌연사한 삼촌은 폭염 속에서 보름이나 방치되고, 바닥에 녹아내린 그의 유해는 한탸가 직접 삽과 흙손으로 긁어내야 했다. 외삼촌의 정원에 압축기를 두고, 외삼촌과 같은 노후를 꿈꾸던 한탸는 외삼촌의 녹아버린 유해를 수습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외삼촌은 은퇴 후 원하는 삶을 살았으니 행복한 삶이었다 얘기할 수 있을까?  


   

   한탸의 상황은 외삼촌보다 나빠졌다. 세상이 변했다. 한탸의 압축기 스무 대 분량의 일을 해내는 엄청난 크기의 수압 압축기가 부브니에 설치되었다. 그 압축기를 직접 목격한 한탸는 혼란에 빠진다. "불안에 곤두선 책장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 안에 숨겨진 가치 따위는 전혀 아랑곳없이 냉정하게 작업을 이어"가는 사회주의 단원들을 보며 그는 세상이 변했을 알게 된다.

"저 거대한 압축기가 다른 모든 압축기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도 상이한 유형의 사람들과 작업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실수로 그곳에 버려지는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니까!"  (p.91)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능한 인간이고 바보 천치였다. (중략) 나는 멍청한 인간이었고, 내 작은 압축기보다 더 미미한 존재였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일했다. 부브니의 속도로 종이를 갈퀴로 퍼 담았고, 반짝이는 표지의 책들이 내 곁에서 수다를 떨어내도 마음을 굳게 다 잡았다.  (중략) 그러자 2시간 만에 종이 더미가 말끔히 치워졌다. (중략)그러나 나는 쓰레깃더미를 치우듯 그것들을, 슬그머니 눈길이 가 닿은 <도덕 형이상학>마저 내 압축기 속에 처넣었는데. 그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익명의 꾸러미들을 미친 듯이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고대나 현대 화가의 복제화 따위도 염두에 없었다.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예술과 창조, 미의 창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중략) 부브니의 사람들처럼 무심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저녁엔 일을 모두 마치고 쓰레기도 모두 말끔히 치워, 나도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였다." (p.98~p.99)

    한탸는 폐지를 압축하는 일은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p.74)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일을 하며 겪은 분열적 마음을 극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책을 구해 집으로 가져가고 꾸러미를 아름다운 그림 종이로 소중히 감싸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화와 정신'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은 자신을 "스스로 대견하고 성스럽게 여겼다". (p.75)

   그러나 부브니의 거대한 압축기는 그 모든 의미를 무의미로 만들었다.  더 이상 그의 방식은 유효하지 않다. 삶을 부정당한 한탸는 만차를 찾아간다.  (자신과 다르게) 적당히 속물적이고 현실적이었던 만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책이라면 질겁하며 단 한 권 도 읽지 않았던 만차가 말년에 성스러움의 경지까지 올랐음을"(p.102)을 알게 되었다. 한탸가 고집스럽게 자신만으로 기준을 고수하며 사는 동안 만차는 시대의 흐름에 능숙하게 자신을 맞췄다. 


"만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쉴 새 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책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 (p.104)

       


  이제 그는 더 이상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 살아온"(p.106) 한탸는 이제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는 일을 배정받았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내 압축기와 내 지하실과 내 책들에게로, 내가 살아내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그것들에게도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p.111~p.112) 
"나는 녹색 버튼의 작동을 중단하고 폐지가 가득한 압축통 속에 나를 위한 작은 은신처를 마련한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중략) 무릎을 꿇은 자세로 녹색 버튼을 누르고 완충물인 책과 폐지 속에서 몸을 웅크린다. (중략) 멜란 트리 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느니 여기 내 지하실에서 종말을 맞기로 했다.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압축통 벽에 눌려 내 다리와 턱이 들러붙고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일어진다 해도 결단코 두 손을 놓고 천국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자리를 바꾸게 할 수 없을 것이다." (p.131)

작가는 '프라하의 봄' 이후 1989년까지 정부의 검열과 감시를 당했다. 심지어 그의 책들은 이십여 년간 출판 금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밀란쿠데라 처럼 망명하지 않고 끝끝내 조국에 남아있었던 그 마음이 한탸의 저 외침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한탸의 외침은 작가 자신의 다짐으로 읽힌다. 프라하의 봄 이후, 정부의 검열과 감시를 당하고, 그의 작품들은 출판 금지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는 망명하지 않고 끝까지 조국에 남아 작업을 계속했다. 죽음을 선택한 한탸는 바르샤바 군대의 침공으로 프라하의 봄이 좌절되고, 수십만 명의 개혁 지지자들이 죽음을 당하는 시절을 살아가던 작가 자신의 일부였을 것이다. 조국에 남았다는 선택이 아마도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과 동의어일 테니까.

   


    그렇다면 한탸와 데칼코마니 같다 생각했던 2019년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신이 숭배하는 책을 파괴하는 일로 먹고사는 모순된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을 했던 한탸. 그리고 그 과정에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담았던 그는 비록 '파괴적인 방법이지만' 삶의 방식을 고수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의 자살은 독자 입장에서는 허망하지만, 한탸 입장에서는 필연적이다. 

    

   "회사 그만두고 싶다."라고 습관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모든 직장인이 하는 만큼 은밀하게, 그리고 자주 퇴사를 꿈꾼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으로서. 그러나  만약 내가 한탸가 멜란트리흐 지하실로 쫓겨가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지도 않다. 나는 처음로 입사한 회사에서 14년째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유사한 일을 하고 있다. 점점 대체 가능해지는 가성비 떨어지는 인력이 되고 있다.) 한탸에게 제발 일에 집중하라고 잔소리를 퍼붓던 소장처럼, 나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주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유사한 일을 계속 선택해왔다. 물론 한탸처럼 소명의식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변화가 싫고 두려웠을 뿐.  이쯤되면 한탸와 데칼코마니라고 하기에도 좀 부끄러운 생각마저 든다. 오히려 지금까지 삶의 태도는 '오렌지색이나 푸른색 장갑을 끼고 노란 미국식 캡을 쓴 사회주의 노동 단원'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우유나 코카콜라를 들이켜며,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괴테도, 불멸의 고대 그리스도 모르면서 '헬라스'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젊은이들 말이다.  그러나 이 짧은 서평에 내 인생의 반성문을 작성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지금이라도 만차처럼 살겠다던가 혹은 한탸처럼 신념을 지키겠다던가 하는 다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대는 언제나 변했고, 시간은 나이 든 사람을 배신한다. 한탸가 자신의 소명을 지킨 것은 그의 삶의 방식을 뿐이다. 다만, 한탸가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집시여인의 이름 "일론카"를 비로소 기억해내는 것처럼 나도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그것이 '인간적인 무엇' 이었으면 좋겠다. 

결국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은 '바니타스 바니타툼'이니 역설적이게도 그 인간적인 순간의 기억이 나의 끝을 외롭지 않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어쩌면 인생은 그 순간을 찾기 위해 사는 것일지도.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직장인은 퇴사한다.’는 명제에 대한 고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