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네오페이퍼 Nov 11. 2019

끊임없이 말을 하겠어요.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보고 

"나는 집에 갇혀있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이 집에 와서 나 대신 아이를 돌봐주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출장 산후 도우미를 불러 살림과 아이 돌봄에 도움을 받았다. 나 대신 설거지를 하거나, 아이를 씻겨주거나 혹은 내 밥을 차려주는 등의 도움보다 더 고마웠던 점은 내가 아이를 맡겨두고 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낳고 한 달 만에 나는 처음으로 혼자서 길을 걷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했다. 그때 폐 속까지 스며들던 공기의 차가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홀가분함 이면에는 불안함도 컸다. 낯선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고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걸까? 설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동전의 양면 같은 양가적 감정이 커피 마시는 내내 소용돌이쳤다. 이 분열하는 마음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숙제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아이를 낳고 또 당황스러웠던 것은 '돌봄 노동'이란 무엇인지 내가 전혀 몰랐다는 점이었다. 엄마 집에서 30년 넘게 살고, 남편과 소꿉장난 같은 신혼생활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나는 엄마가 되었다. 정서적으로는 출산 전 읽은 한 권의 육아책 '프랑스 아이처럼'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신체적으로는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저절로 크겠지 싶었다. 그러나 신생아를 하루하루 키워나가는 일은 전쟁이었다. 개월 수에 따른 분유량을 어떻게 늘려줘야 하는지. 아이의 똥이 의미하는 건강상태는 무엇인지, 개월 수에 맞는 적절한 발달 상태는 무엇인지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아이가 오래 자면 오래 자는 대로 걱정이었고, 아이가 계속 깨면 계속 깨는 대로 힘이 들었다. 혹시 내 실수로 아이가 잘못될까 봐 무서웠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이 돌보는 이 시간이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아 무서웠다. 다행히 아이는 별 탈 없이 자라 나는 아이 11개월에 복직을 선택했다. 나의 서투름과 불안함을 보완해줄 해결책으로 입주도우미를 구했었다.

   이제 아이는 네 돌이 막 지났고, 지금은 부부와 아이, 그리고 하원 도우미 체계로 '버티고' 있다. 요즘 가장 무서운 말은 출장, 고객사 미팅, 프로젝트 투입 그리고 "어머니~솔빈이 열나요..."라는 전화.  (신랑의 육아 동참에 대해서는 불만이 하나도 없다. 주양육자로서 손색없고, 집안일에 대한 참여도도 충분하다. 다만 회사가 멀어 현실적으로 아이 등원이 불가능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우려스러운 상황 중  하나라도 발생하면 빨간 불이다. 상황 발생 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며 상황 속에서 최선을 선택을 하게 된다. 회사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달갑지 않고, 아이는 "엄마 회사 관둬"를 입에 달고 산다. 가끔은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긴장해서 긴장한 줄도 모르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맞벌이 직장 생활하며, 아이 하나 낳고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80년대 어떤 여자의 이야기다. 


   「 82년생 김지영 」   소설을 읽고, 모든 문장에 공감하고 밑줄을 그었다. 정유미 주연으로 영화화된다고 했을 때 더 기대가 컸다. 정유미라면 지금 30대들의 여성들이 좋아하는 로맨스의 주인공 아니던가? 케세라세라의 한은수,  로맨스가 필요해의 주열매, 연애의 발견 한여름. 항상 주체적인 선택을 하던 그녀가 엄마가 되었을 때, 그런 그녀가 어쩔 수 없는 상황들에 쳐했을 때 수많은 엄마들이 느끼는 불안과 분노 혹은 절망이 더 극적으로 그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영화는 아쉬웠다. 누군가의 평처럼 '무난한 가족영화'로 전락해버린 느낌이었다.

    

   김지영이 아프고 그 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왜 김지영이 아프게 되었는지 좀 더 세밀하게 그녀의 내면의 서사를 그렸으면 어땠을까? 매일매일 낯선 모습으로 나에게 새로운 미션을 던지는 육아의 현실, 남들은 다 잘 키우는 것 같은데 나만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좌절감, 남편이 출근하고 현관문이 닫힐 때 그 현관문을 바라볼 때의 심정, 하면 티 안 나고 안 했을 때는 난장판인 집안일, 나만 현실에 뒤쳐지는 것은 아닌가 싶은 불안감. 그리고 한 명의 경제적 주체에서 이제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할 때 겪는 미묘한 치사함 같은 것들을 밀도 있게 그려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며 결국  세상의 편견에 맞서기 위해서는  내 안의 가부장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 안의 가부장을 무너뜨린 다는 것은  남편의 육아휴직 계획에 시어머니가 화를 냈을 때, "어머니 말씀도 틀린 것은 없지" 라며 복귀를 포기하지 말고, "어머니 저도 일을 하고 싶어요. 부부의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하고, 아픈 팔로 아이를 안고 차린 저녁 식탁에 남편이 밥 먹는 동안 아이 밥 먹이지 말고 먼저 앉아서 제대로 밥을 먹고, 걱정하는 눈으로 맥주나 마시고 있는 남편에게 빨래 좀 개라고 말을 하는 사소한 행동들일 것이다. 남자는 바깥일을 해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시선, 집안일은 돈을 벌지 않는 아내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회의 시선, 바깥에서 일하고 온 남편이 집안일에 시달린 나보다 더 대접받아야 한다는 본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말이다.

 

   김지영이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자신은 없지만, 말을 하지 않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는 신호탄이다.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를 더 이상 하고 싶다는 의지, 나도 당신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는 외침, 엄마의 희생으로 내 삶을 지키는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들.  

 

"당신 나 알아요?" 

 

   초등학교 때 남자 반장-남자 부반장-여자 반장이 경우가 많았는데 1990년도 들어서면서 제도가 바뀌면서 남자 반장과 여자 반장을 각각 선출했었다. 바뀐 제도를 경험하면서 '반장은 남자가 하는 거구나'에서 '여자도 반장이 될 수 있구나'로 생각도 바뀌었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세대는 여자도 남자와 같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물론 여자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성추행을 경험하고  '여자가 조신해야지' ', '그건 그 여자가 그럴만했네'라는 사회적 편견은 그대로였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동일하게 대학에 진학하고, 취직을 하고 돈을 벌었다. 신자유주의 이후 여성의 경제활동이 비단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이 아니라 경제 단위가 가족에서 개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측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경제적 주체로서의 삶을 경험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주체로서의 경험은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한 측면이기도 하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집안에 갇히게 된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제대로 된 어떠한 평가도 받지 못하는 돌봄 노동을 하며 나를 지워간다. 거기에 벌레 취급은 덤이다.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아'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지영이 엄마 미숙이처럼 원래 다 그러고 살았던 엄마들은 딸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가르쳤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던 딸들이지만 결국엔 출구 없는 방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김지영이 아팠던 것처럼. 소설은 그런 현실의 단면을 칼로 잘라 명확하게 보여줬다면 영화는 그런 김지영이 자신만의 길을 찾는 모습을 그려준다. 그녀는 "당신 나 알아요?"라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노트북을 켜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간다.  최근 수많은 엄마 경험을 담은 책들이 출판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영화가 중산층 대졸 여성의 배부른 투정에 불과하다는 비판(비난)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누구의 서사든 가려져 있던 삶이 이야기되는 것은 무조건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김지영의 서사가 이야기되어야, (김지영의 엄마) 미숙이의 삶도 이야기되고, 비정규직 맞벌이 노동하는 엄마의 이야기, 한국으로 시집온 베트남 여자의 이야기 등 수많은 다른 층위의 이야기도 포착되고 목소리를 가질 기회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평점 1의 테러를 던지는 수많은 남성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지 말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보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더이상 비겁하지 않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