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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Jan 04. 2020

네네. 작심삼일 300번할라고요.

마흔 하나의 새해계획 

   


새해 첫 주말, 냉장고 청소를 했다. 

올리브, 바질 페스토, 월남쌈 소스, 굴소스 등이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휴직했을 때 곧 잘 사용하던 재료들이었는데, 복직하고 반년 사이 그 존재를 잊었다. 쓸 일이 없어서... 연말 꼬마 손님맞이용으로 사두었던 각종 요구르트와 요플레 등도 버렸다. 솔빈이는 잘 안 먹지만, 다른 꼬마 손님들이 찾을까 봐 사두었던 것들이다. 당분간 손님 초대할 일은 없으니 유통기한이 지나도 냉장고에 그대로 있을터 미련을 버리고 보내주었다. 말라비틀어진 사과와 아보카도, 눅눅해진 밤,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양배추까지 모두 쓸어서 버리고 나니 냉장고가 반쯤은 빈다. 과감히 버리고 순간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버릴 때 내가 꽤 괜찮은 사람 같다. 

 


    매년 새해가 되면 부지런히 계획을 세우곤 했었다. 신정에 한번, 구정에 한번, 3월에 한번. 새해 계획을 계속 세우는 이유는 당연히 행동이 작심삼일이기 때문이다.  계획에 꼭 들어가 있던 것들이 살 빼기, 영어 공부하기 등이 었는데 지금도 뚱뚱하고 영어로 말 한마디로 못하는 걸 보면 내가 얼마나 꾸준히 작심삼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계획들이었다. 예를 들어 살을 빼려면 구체적인 액션 플랜이 있어야 한다. 운동을 하루에 몇 시간 한다던지, 혹은 식단을 어떻게 조절한다던지 등등. 다이어리에 '살 빼기'라고 쓴 세 글자 쓰는 에너지가 저절로 내 지방 덩어리를 연소시켜주지는 않을 터이니. 그럼에도 꾸준히 계획을 세우는 이유는 그 계획이 자기 연민과 혐오를 지속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연료이기 때문이다. 

그 뻔한 클리쎄, 아! 나는 계획을 지키지 못했다어. 역시 난 무쓸모 인간이야. 자기 합리화. 


    사실 피해자 서사로 구성된 자기 인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불행하지만 속 편한 일이었다. 교인들이 좋은 일은 하나님의 은혜고, 나쁜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지킬 마음이 없는 계획을 지키지 못할 방식으로 세운다. 당연히 지킬 수 없는 계획을 지키지 못한 나에게 '역시 그럴지 알았어, 그런데 내가 그 계획을 지키지 못한 것은 내 탓이 아니야. 상황 탓이지. 오 역시 나는 불쌍해.'라고 속삭이며 동시에 '역시 극복을 못하는 걸 보니 넌 형편없는 인간이군.' 이라며 꾸짖는다. 열심히 나의 모든 에너지를 이 핑퐁 놀이에 쏟고 나면 무엇인가 열심히 한 것만 같은 생각에 그래, 이제 술 한잔 해야겠군.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 이 알코올 중독자 같은 결론은 무엇...)



     그런데 인생의 변수가 생겼다. 그 변수는 딸. 

그렇다. 나는 딸이 있다. 분명 내가 결정해서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내가 엄마라는 사실에 매번 새롭게 당황하는 그런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그 아이는 그에게 최초의 인간인 나를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굳이 대상관계 이론의 여러 가지 개념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이의 말투, 아이의 사고 전개, 아이의 행동을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  나의 빈곤한 서사가 아이의 렌즈가 된다....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나는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유통기한 지난 상처들과 곰팡이가 피다 못해 곰팡이 밭이 되어버린 기억들이 가져다 버리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최고의 엄마가 되겠다는 그런 다짐은 꿈도 안 꾼다. 적어도 아이에게 버거운 엄마는 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해서 내 나이 마흔에 열심히 버렸다. 그렇게 꼭 안고 있던 상처들이 생각보다 쉽게 버려지더라. 아이는 나의 마데카솔. 



   덕분에 나는 내가 불쌍하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고 나니 내가 더 눈에 잘 들어왔다. 내가 (건강에 위험이 오고 있음에도) 살을 빼지 못하고, (영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공부를 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게으르기 때문이었다. 절실히 원하지 않아서. 원래 피해자 서사에 필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내가 원래 되고 싶었던 그러나 상황 때문에 되지 못했던, 그 상황만 아니라면 될 수 있었던 이상적 자아'인데 아마도 나에겐 그 자아가 '날씬하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푸하하. 



 "넌 내가 엄청 어른 같지? 나도 내가 6학년이 되면 엄청 어른이 될지 알았어.
근데 아니더라. 너도 내 나이 되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9살쯤 학교 가는 길에 만난 동네 언니가 뜬금없이 던진 말이다. 왜 저런 얘기가 나왔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도 내가 언니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봤으리라. 그때 언니의 말이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그 언니는 기억 안 나지만 언니가 얘기해주던 말투, 그 날의 온도 같은 것은 생생하다. (그 언니는 누구였을까?) 스물의 나는 마흔이 되면 엄청 어른이 되어 있을 것 같았다. 전문가에 여유 있고 생을 관조하는 그런 사람.  그런데 정작 마흔이 된 지금 나는 쉰을 그리고 환갑을 기대하지 않는다. 지금 불안하고 휘청이는 것처럼 그때도 여전히 좋은 선택은 무엇일까?라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다 결정되어 버린 것 같은 순간에  생각하지 못했던 이유로 내가 변하는 걸 보니, 세상은 계속 살고 볼 일이다. 


그래서 또 신년 계획을 좀 세워보려고 하는데, 

살을 빼려는 건 아니고 허리가 좀 아프니까  일주일에 3번 집까지 계단 걸어서 올라오며 체력을 기르고..

이제와 막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게 아니고, 솔빈이랑 둘이 여행을 가고 싶은데 죽을 수는 없으니까 생존 영어 학습 차원에서 매일 10분씩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해보려고....

마지막으로 나는 똑똑한 사람에 대한 로망이 있으니까 하루에 최소 30분은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할 건데....


과연... 내년에 나는 무슨 말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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