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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Jul 22. 2020

공감하고 싶지만.

정혜신 박사 <당신이 옳다> 강의 를 듣고

며칠 전 회사에서 정혜신 박사 강의가 있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한 짧은 강의였지만 직접 대면으로 뵐 수 있는 기회여서 다녀왔다 

수십 년간 상담현장에서 그리고 트라우마가 남을 수밖에 없는 삶의 현장(쌍용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생존자 및 유가족 등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사건의 중심에서 트라우마를 겪을 수 없는 사람들을 상담해주고 계신다.)에서 얻은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엔 공감의 힘.


그는. 모든 사람은 옳다고 이야기한다.

윤리적 도덕적 잣대의 옮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서사를 인정하겠다.'는 의미이다. 우리 모두는 다르고 각자는 고유의 역사가 있다. 한두 장면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 마음을 먹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때  윤리적 옳고 그름을 떠나 "당신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당신은 그르지 않았어. 당신은 괜찮아."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당신은 옳다.'는 그 인정이 사람을 지옥 불구덩이에서도 구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옳다는 인정이 바로  "공감"이다. 


공감은 우쭈쭈와 다르다. 일방적 희생을 담보로 하는 감정 노동이 아니다.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감정적 리액션도 아니다. 공감은 " 한 존재가 또 다른 존재와 만나는 것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존재와 존재가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혜신 박사는 "질문하기"가 그 방법이라고 했다. 

 - 나는 네가 왜 그런 기분인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에게 이야기해달라.

그 대화의 과정에서 공감은 일어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묻지 않는다. 

" 내가 다 아는데..."  " 걔가 그러는 거 다 이래서 일거야..."라고 생각하고 묻지 않는다.  

상대를 이해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질문하는 팁(?)에 대해  질문을 하려는 찰나에 정혜신 박사가 내 질문을 예견한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그리고 우리가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궁금해야 해요~ "

 

공감은 아는 만큼 할 수 있는데 알려면 끝까지 질문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에게 질문하지 않고 충 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만날 수 없다...


  얼마 전에 읽은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이 정의한 사랑과  <현대사회의 성, 사랑, 섹슈얼리티>에서 기든스가 말한  순수한 관계가 맞닿는 이야기다.  성숙한 두 개인의 만남. 서로의 경계를 잘 유지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헌신하고 항상 관심을 가지고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  결국 그들이 말하는 사랑도 서로 공감하는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닐까?

  

   강의를 듣는 내내 머릿속에 떠나지 않은 질문이 있었다. 공감하려면 성숙한 두 개인이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데, 만약 상대방이 공감할. 공감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과연 그게 가능할까?  질문하는 쪽이 궁금해하는 쪽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이 감정노동과 과연 무슨 차이일까? 


  이번에도 박사님은 내 질문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강의를 이어나갔다. 

"공감이 깃든 대화를 하려면, 우린 수평적 관계여야 해요. " 


다 통하는 이야기 맞는구나... 싶어 반가우면서도 반가우면서도 심리학의 한계를 마주한 것 같았다.

기울어진 운동장 투성이인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 수평적 관계를 전제로 한 공감이 정말로 일반화되고 가능한 것일까? 상담실 안에서 '내담자와 치료자' 간에만 가능한 이야기는 아닐까?


자본가가 노동자를 공감하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공감하고, 남편이 아내를 공감하고, 부모가 자식을 공감하고. 과연 진정한 공감이란 것이 가능한 것일까? 


심리학에서는 속 편하게 "수평적 관계에서 진심으로 질문을 하면 공감을 할 수 있고 구원 가능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정말로 심리학은 실존의 위기에 처한 현대인의 또 다른 종교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중략)
근본적인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에센스 차원에서 경험하는 것이요,
각자가 자신들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합일되는 것이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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