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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Sep 05. 2020

새로운 사랑, 그것은 낭만적 우정.

<사랑은 사치일까> by  벨훅스

    친구들은 30대 초반, 늦어도 30대 중반에 대부분 결혼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몇 년 하는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패턴이었다. 초중고 졸업 후 대학 가고 취직하는 것처럼 그다음 step을 밟듯 그렇게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우리"결혼 후 생활"에 대해서 제대로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과는 대혼란기. 신데렐라도 백설공주도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 중에 '그 후로 모두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결론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하지 않더라도,  우린 모두 페미니즘의 세례를 빚을 졌다. 여자에게 엄마, 아내 같은 사적 영역에서의 돌봄 말고  "자아실현", "개인의 삶의 성취"를 꿈꿀 수 있게 해 준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빈 둥지 증후군에 시달리는 엄마를 버거워하며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외쳤고, 엄마들도 (그게 비록 보상심리일지라도) " 엄마처럼 살지 마"라고 응원을 했다. 우린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그 자아실현의 현재가 쭈구리일지라도!   


   그러나 도와 관습은 힘이 세다. '주입되고 학습되고 기대되는 역할'과 '좀 다르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 충돌할 때,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내가 의지가 있다고 무조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특히, 그 기대되는 모습이 가족 내에서 어떤 역할일 때 그 싸움에서 지기 쉽다. 더 어려운 건 그 경계가 어디인지도 잘 가늠이 안될 때다. 울화통은 터지고, 화는 나는데 도대체 어디를 향해 삿대질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을 때. 


   친구가 결혼하고 맞이하는 첫 명절날  시댁에 누워 울음을 터트렸다 했을 때, 그 마음을 전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꼭 같은 경험을 하던 날, 엄마도 보고 싶었지만 친구도 보고 싶었다. 삼십 년 넘게 관찰한 엄마의 며느리로서의 삶,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재현된 며느리의 이미지가 내 안에 있었다.  그것이 무의식 중에 시댁에서 내 행동의 준거기준이 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충실히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며느리라는 역할 외에 나라는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느라 지레 지쳐버렸다. 아무도 나에게 입을 다물라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의 의견을 말할 수 없는 것 같은 기분. 설령 말을 하더라도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서러웠던 게다. 아이를 키우는 것.... 아이에게 처음으로 젖을 물리면서 깨달았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든 순간에 서툴렀다. 좋은 엄마는커녕 아이의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돌봄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육체적인 피곤함과 내가 소멸되는 것 같은 정신적인 허기짐조차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돌아왔다. 머리로는 '엄마이지만 엄마가 아닌 나'를 원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가 전부여야 좋은 엄마"라는 상업적, 억압적 모성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사이에서 분열하며 고군분투하는 동시에, 육아의 무게추가 나에게만 쏠리지 않도록 남편과 미시, 거시 조정을 하는 협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카톡, 카톡" 여러 개의 단톡 방에서 '나'와 며느리, 아내, 엄마의 역할 사이에서 균형추를 잡기 위한 투쟁 사례가 끝없이 울려 퍼졌다. 사랑하고 행복하기 위해 결혼을 했는데 사랑은커녕 존재가 위기감을 느낄 지경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모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  가부장제라는 이상한 나라! 


  벨 훅스의 <사랑은 사치일까>를 읽었다. 벨 훅스는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정의한 사랑에 기초하여 "나로 살기 위한 지지와 연대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롬의 사랑은 "자기야 사랑해~우리 사랑 영원히~"라고 속삭이는 달콤한 수사가 아니다. 그의 사랑은  "그 사람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상대의 관점에서 보고, 그가 원할 때 언제든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호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 각자가 성숙할 때 그리고 헌신의 마음을 갖추었을 때 가능한 사랑이다.   


    가부장제 하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누리고 있은 것들을 포기하지 못한다. 벨 훅스는 여러 장에 걸쳐서 가부장제의 남성과 사랑하는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나로 살기'를 원하는 여자들은 그러한 사랑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사랑은 없다고 외면해버린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함과 동시에 가부장제에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돌봄의 역할을 모두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이성애 부부들이 모두 만족하며 사는 것도 아니다. "남자는 애 아니며 개"라고 생각하며, 정서적 만족을 포기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   


    누구도 아닌 내가 성장하고 성숙할 때 가장 큰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지금과 다른 삶, 다른 행동을 선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자기 확신이 있어도 그것이 주위 사람들과 환경에 어떤 파급효과가 있을 때 나만이 고집대로만 행동하기란 어렵다. 그럴 때 바로 사랑이 필요하다. 정말로 나의 성장을 바라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고, 나의 선택을 지지해주는 사람 말이다.  <82년생 김지영>에서 첫 번째 사회 복귀의 기회를 놓아버릴 때, 만약 남편 정대현이 좀 더 강력한 지지를 해주었더라면, 그녀는 아마 씩씩하게 복직을 선택했을 것이다. 


  벨 훅스는 훅 치고 들어와 우리에게 "낭만적 우정"이라는 선택지를 보여준다. 나의 삶에 연대와 지지를 보내는 첫 번째 관계가 가부장제 남성이어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보자고 제안한다. 

"깊고 영속적인 낭만적 우정에서 개인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치유의 과정에서 겪는 기쁨과 고통은 모두 공유된다.
(중략) 다양한 형태의 연대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여성이 자유롭게 낭만적 우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안정적이고 헌신적인 평생의 플라토닉 한 관계를 주된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그런 관계야 말로 여성이 완벽한 짝을 찾아내지 않아도 여전히 진실되고 헌신적인 사랑에 관해 알 수 있게 해 준다. 결국에는 이런 사랑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남성 대부분이 만족하는 관계에서 많은 여성들은 허기를 느낀다. 

많은 여성들이 남편과의 소통 불가능함에 대해 고통을 호소한다.  

일상 속에서 내뱉는 위계적 말들에 상처 받은 여성들이 얼마나 자주 헤어짐을 생각했던가. 

결혼을 했으니 삶에서 필요한 위로와 지지는 남편에게 받아야 한다는 강박이 얼마나 우리를 외롭게 했단가.. 


내가 선택한 그 사람이 성장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삶의 가치관이 나와 다른 사람이라도, 내가 관습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결혼을 했으니 내 남은 삶을 그 사람을 설득하는데 바쳐야 하는 걸까?  "저 사람은 사람은 좋은데, 아직 몰라서 그래. 내가 원석을 보석으로 바꿀 거야"라는 건 평강공주 코스프레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훅스는 말한다. 여자들도 그저 돌봄을 좀 더 잘하도록 교육을 받고 자랐고, 그 역할을 하도록 강제되었기 때문에 돌봄에 좀 더 익숙할 뿐 사랑을 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도 공부하고 성장하며 살기 바쁜데, 마음에도 없는 사람을 구원하는데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다고. 오히려 서로의 성장에 연대와 지지를 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 느슨한 공동체, 낭만적 우정을 가꾸는 것도 우리에게 바로 사랑이라고


 김병국 의원( 여성가족부가 선정한 성교육 책을 비판한 국회의원 ) 이 보면, 동성애를 조장하는 책이라고 노발대발하겠지만, 책을 덮으면서 속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기울어진 운동장, 어떻게든 바꿔보겠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그 운동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진짜 네가 원하는 달리기이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달리는 게 아니지 않냐고 너무 유쾌하게,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해줘서.  


이 책의 개정판에 붙은 부제는 "그 누구도 아닌 나로 살기 위한 페미니즘"이다.  

맞다. 내가, 그리고 나의 자매들이 원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로 사는 것.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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